더불어민주당이 총선 70여일을 남겨두고 '게임의 룰'인 선거제도에 대한 입장을 여러 차례 바꾸며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고 있다.
23일 정치권에 따르면 여야는 선거제도 개편안을 2월1일 본회의 상정해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협상에 나서고 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민주당은 다수당으로서 선거제 개편의 키를 쥐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병립형으로 기울다 현행 준연동형으로 선회하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준연동형 비례대표 유지가 꼼수 위성정당을 재현할 것이라는 비판에 병립형과 준연동형제를 절충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선회한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11월 라이브 방송에서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는 발언을 하면서 병립형 회귀가 기정사실화 되기도 했지만 최근 시민사회와 군소 정당들의 반발에 준연동형 유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여전히 내부 여론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병립형을 선택하게 되면 선거에서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유리하지만 선거제도 개혁 공약을 스스로 파기하게 된다. 준연동형을 유지하면 국민의힘을 포함해 위성정당 난립을 막지 못하고, 의석 수에서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이에 민주당은 제3의 방안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장인 남인순 민주당 의원은 전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동안 '준연동형제냐, 병립형 회귀냐' 이렇게만 이야기를 해 왔었는데 저는 제3의 대안도 좀 같이 고민을 해 봐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기본적으로 병립형과 같지만 전체 비례 의석 47석을 전국 단위가 아닌 수도권, 중부권, 남부권 등 3권역으로 나눠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 완화에 강점이 있다. 영호남이 하나의 권역으로 묶이면 대구·경북 지역에서 민주당 의원이, 호남에서 국민의힘 의원이 나올 수 있다.
다만, 소수정당이 원내에 진입하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기존 병립형 제도는 전국에서 3%의 정당 득표율을 얻으면 비례 의석을 배분받는데, 권역별로 나뉘면 최소 8% 이상 득표를 얻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은 선거제도 타협안으로 '소수정당 배분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제안했다. 이는 각 권역 비례 의석의 30%를 정당 득표율 3% 이상을 얻은 소수 정당에게 먼저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시행하면 소수 정당은 최소 15석을 확보할 수 있다.
여야는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 비례대표를 전국 단위가 아닌 권역별로 선출하자는 데까지만 일정 부분 의견 일치를 이뤘다.
제3지대 신당은 민주당의 권역별 비례대표제 제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새로운미래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국민께 아무 희망도 되어드리지 못하고 있는데도 이런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거대 양당의 이기주의는 잔인할 정도"라며 "비례대표제에서 최악의 꼼수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민 미래대연합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은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지난번에 17석을 병립형으로 하고 30석을 연동형으로 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30석을 병립형으로 하고 17석만 나눠주겠다는 것"이라며 "지난번보다 완전히 후퇴하는 이런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했다.
민주당은 25일 의원총회를 열고 선거제 관련 논의를 이어간다.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당내에서 오래 전부터 논의해 온 사안"이라며 "선거제도에 관한 결론을 내리려면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선거 결과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수가 조정되는 제도이다. 민주당이 국민의힘을 제외하고 소수 야당과 연합해 도입한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에서 정당이 받은 득표율에 비례해 의석을 산출한 후 그 만큼 의석을 채우지 못했을 때 비례대표에서 모자란 의석의 절반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거대 양당으로 의석수가 편중되는 현상을 막고 소수정당의 원내 입성을 도울 수 있다는 취지에서 채택됐지만 표의 비례성, 대표성, 다양성 강화 등 명분에도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꼼수로 이어지면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되려 거대 양당 체제 강화, 위성정당 출신 인사의 극단적인 행보 등 부작용을 야기했다.
국민의힘은 물론 민주당 일각에서도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단순 배분하는 병립형으로 회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동시에 선출하는 방식이다. 지역구에서는 각 후보가 다수결 원칙에 따라 선출되고, 비례대표에서는 각 정당의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이 배분된다. 병립형 비례제에선 각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 의석을 배분한다. 지역구 의석 253석과 별개로 비례대표 의석 47개를 각 정당 득표율에 따라 나누는데, 20대 총선까지 이 방식이 적용됐다.
병립형은 계산 방식이 비교적 단순해 유권자들이 선거제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 가능성이 낮고 결과적으로 거대 양당이 의석을 독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게 고질적 한계로 지적됐다.
그래서 병립형 회귀는 거대 양당 기득권 타파라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정신을 저버리는 개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 규칙이 전체 선수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일부 선수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급하게 결정되면서 출발부터 결함이 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비례연합정당은 민주당을 비롯한 범야권이 연합해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하는 정당을 말한다.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열린민주당이 모인 개혁연합신당 추진협의체는 민주당을 포함한 진보 진영에 비례연합정당을 제안했다. 민주당은 지역구에 집중하는 대신, 비례대표는 범야권 단일 후보로 내세워 '윤석열 정권 심판' 여론을 모으자는 취지다.
이에 대해 홍익표 원내대표는 지난 15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위성정당 제도를 방지할 수 없을 때 불가피한 선택지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저희가 받는다는 게 아니라 논의를 해볼만한 상황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우원식 전 원내대표도 입장문을 통해 “최대 격전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일대일 구도를 만들 연합정치가 필요하다”며 비례연합정당 제안을 지지했다.
정의당도 비례연합정당에 조건부 합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준연동형 비례제가 유지될 경우 민주당과 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용혜인 개혁연합신당 추진협의체 공동대표는 22일 민주진보진영에 제안한 비례연합정당의 출범 시한을 1월 말로 정하고 더불어민주당의 빠른 결단을 촉구했다. 용의원은 "비례연합정당이 선거 때만 뭉쳤다가 헤어지는 ‘떴다방 정당’이 아니냐는 우려를 실천으로 불식시키는 연합을 추진해야 한다”며 “총선 후 각 정당 당선자의 활동을 존중하되 국민 앞에 맹약한 윤석열 정권 심판과 구체적 개혁 과제 만큼은 절대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3지대 신당은 여당의 병립형 회귀 방침, 야당의 비례연합정당 제안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역구 당선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준연동형이 유지되면 비례대표에서 의석을 얻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원석 미래대연합(가칭) 수석대변인은 전날 확대운영위 후 기자들과 만나 선거제 개편안에 대해 "양당 기득권 정치를 가장 완강하게 유지시키는 기제가 현행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비례제였다고 생각한다"며 "4년 전에 선거제 개혁을 해서 연동형 비례제가 됐는데 위성정당으로 개혁 취지가 무력화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