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사진=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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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독일을 떠나 오랜 망명 생활을 거쳐 런던 한 골목에서 가난하고 고독하고 절박하게 저술한 『자본론』은 세계를 뒤흔든 저작이 되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노동자의 삶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중의 삶이 행복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착취로 얻은 자본의 잉여가치가 거대한 자본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임을 과학적으로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경제학만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이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결정된 계급 모순에 있고,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과제는 노동자계급에 주어진 과제라는 점은 마르크스주의의 최소한의 테두리다. 

19세기 말 가장 발전한 영국의 자본주의는 21세기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형상으로 승승장구해오고 있다. 당면한 역사적 국면과 사회적인 제 형태에 따라 자본주의는 각기 다른 파시즘의 모습으로 역사를 가로질러 파국을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가 되었다. 누가 멈춰 세울 것인가.

원제로는 식인 자본주의(Canibal Capitialism)라는 제목의 책이 다시금 마르크스의 이름을 출판시장에 소환해냈다. 우리말로 번역본이 출간될 때 제목이 『좌파의 길』로 되어 있어서 “길”을 보려는 독자들은 주로 미래로 향하는 길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된 21세기 좌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정치 지형의 공간에서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지는 않다. 어디서건 희망을 보려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 길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프레이저는 최근 일련의 진보 논의에서 이전 저작들을 통해 그 이름이 꽤 알려져 있다. 페미니즘 정체성 정치를 좌파적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고, 자유주의적 정치 이론에서 독점되어 온 정의이론 내부로 침입해 인정이론과의 대결 속에서 새롭게 방향전환 해야 함을 주장해왔다.

노동뿐만 아니라 환경, 페미니즘과 젠더, 정체성 정치, 제국주의와 제3세계, 포퓰리즘 정치 문제 등 여러 부문들에서 제기되는 사회적인 의제가 전체적인 진보의 관점과 어떻게 연관되어야 하는가의 물음은 21세기 진보가 지향할 기본 방향에 관한 물음이다. 이러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 있다는 점에서 『좌파의 길』이 시사점을 주는 듯하다. 만족할만한가를 묻는 것도 중요하다. 저자가 내심 바라고 있을 터이지만, 독자인 나로서는 의문인 상황이다. 이 점은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역사와 계급의식』의 저자 루카치가 1920년대 코민테른에서 교조주의로 정죄 되고 자아비판을 수행한 일이 있다. 루카치는 한참 나중에 1960년대에 주요저작들의 재판을 출간할 때, 20년대의 상황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소회를 밝히는 곳에서 20세기 좌파 지식인의 한 획을 긋는 비판이론의 이론적 태도를 문제 삼았다.

아도르노를 대표로 한 비판이론은 “심연이라는 이름의 그랜드 호텔”에 안락하게 정주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진보적인 이론은 이론적인 성찰만으로도 충분히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프레이저는 비판이론의 계보에서 이론적 실천을 신뢰하는 듯하다. 

프레이저는 책 맨 앞 ‘감사의 글’에서 책을 내놓은 “저자의 ‘감춰진 장소’”에 대해 언급한다. 프레이저가 마르크스로부터 빌려온 표현인 ‘감춰진 장소’는 자본 증식의 비밀이 풀어지는 장소, 노동계급의 착취가 일어나는 현장이다. 겉으로 드러난 자본주의 사회는 현란한 상품의 세계이지만 상품 세계의 뒷골목을 돌아가면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의 현실이 드러나는 장소,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장소가 있다.

『자본론』에서 착취와 수탈은 마르크스의 의도에 따라 구분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초기 자본이 형성될 때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작용 매커니즘과 다른 가치 형성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 정치 세력과 결탁한 자본가의 수탈은 자본의 전근대적이고 부당한 힘으로 자행된 그야말로 무법하고 뻔뻔한 자본 형성이다. 
프레이저가 주장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이해를 통한 확장과 변형’은 거대한 경제적인 착취 시스템에서 사회 전체로 확장되고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자행되는 수탈 체계로서 자본주의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지불받지 못할 노동시간을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서 제공하는 노동계급의 착취 이면에는 돌봄과 사회적 재생산에서 지불받지 못한 노동, 공공재와 자연 환경에 대한 자본의 특권적 지배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주요 논거로 제시된다.

단순한 상품 생산을 넘어 사회적인 재생산에서, 자연에 대한 자본의 무상 사용에서, 경제적 영역을 넘어 전지구적 정치 권력으로 확장되어, 자본주의는 ‘제도화된 사회질서’로서 인간과 자연환경을 집어삼키고 있다. 프레이저의 이런 기본적인 주장이 이미 마르크스 안에서도 제시된 것이거나 발견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별 소득 없는 논의가 될 것이다. 

수탈과 착취의 결합체인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착취하는 자본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 착취구조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이룬다는 것, 이 모순을 풀기 위해 노동계급의 중심이 서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주요한 쟁점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이 문제 제기는 프레이저의 주장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이기도 하다. 프레이저가 협소하다고 지적한 것이 부당하다고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여러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겹치고 걸쳐 있게 되더라도. 모순들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모순들의 관계가 이론적으로 더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뚫고 제도화된 사회질서를 사회주의적 사회질서로 새롭게 변혁하자는 주장에서 왜 혁명적인 변화를 우회하는 사민주의의 전략만을 사고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의미해야 하는가? 앞 장들에서 전개한 논의가 이에 관한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사회주의에 관해서도 확장된 인식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일단 우리가 자본주의를 단지 경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을 폐기한다면, 사회주의 역시 더는 대안적인 경제 시스템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자본이 상품 생산의 ‘비-경제적’ 기둥을 놓고 제 살 깎아먹기를 하도록 생겨 먹었다면, 이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 역시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만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필수사항(내가 전적으로 지지하는)에 더해, 생산이 이뤄질 수 있게 하는 배경조건과 생산 사이의 관계 또한 변혁해야 한다.”(262-263쪽) 이처럼 진보가 나가야 할 길로서 프레이저는 사회주의를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자는 제안에서 프레이저는 머뭇거리면서 다시 한번 지루하게 전지구적으로 광범위하게 제도화된 체제로서 자본주의를 세운다. 결론적으로, 프레이저는 사회적 생산에 따른 잉여에 대한 민주적인 공동 결정과 비상품적이어야 할 기초적인 공공재 공급 외에도, 존 로머가 사회주의와 시장 경제를 결합할 수 있다고 믿었듯이, 시장과 사회주의가 화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펼쳐지는 각기 다른 다양한 모순들의 백화점이 한순간 사회주의적인 조화의 백화점으로 변모할 수는 없다. 20세기를 가로질러 좌파는 자본주의에 맞선 이 싸움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한 세기를 비틀거리며 방황해왔다.

프레이저가 책에서 제시한 21세기 사회주의의 길 또한 여전히 암중모색이다. 하지만 좌파 진영에 걸친 전체 연관과 총제적인 윤곽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에 따라서 미래를 전망해야 한다는 논의는 현 단계 좌파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열띤 논의로 좌파 정치의 불씨가 살아나길 기대해본다. 

* 이 서평은 「사단법인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웹진 '正道精進'에도 게재됩니다.

박지용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박지용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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