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불가능한 밤... 더 이상 시를 쓰지 말아야 할 순간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의  주어와  술어가  거의  일치하는  상태. 하나마나한 말을 반복하는 상태. 또는 시의 주어와 술어가  거의  분리되는  상태.  의미의  무한  속으로  사라지는 상태.  엔트로피가  제로에  도달하거나,  반대로  최대치에  도달하는 상태. 다른 말로 하자면, 죽음 또는 해탈의 상태. 동일한 상태. 그러므로 시는 죽음과 해탈에 반대한다. (2-1. 산세리프에서 소설 쓰기)

 "나는 이곳에 와서 한 편의 시도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다. 문장들은 내게로 오지 않았다."

시와 소설을 쓰는 작가 이장욱은 산문집 '영혼의 물질적인 밤'을 통해 쓰지 못했던 한때를 고백한다.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천국보다 낯선' 등을 통해 대산문학상과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그에게도 써지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 순간은 바로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다.

산문집에서 그는 기숙사 룸메이트 안드레이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중부 러시아의 추바시로 떠났던 기차 안에서의 풍경을 그린 2004년의 일기부터 시작해 다시 겨울, 글을 쓰기 위해 떠난 부다페스트에서 본 야경을 담은 2023년의 일기까지 30년의 시간을 꺼내놓는다. 그는 한 권의 책을 마친다는 것이 "하나의 죽음"을 겪는 일과도 같다며 지난 시간을 소회한다.

"소설을 쓰는 일 자체보다는,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을 떠올리는 일을 나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가령 하루오라는 인물에 대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오라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문득 눈을 뜨는 순간을. 눈을 뜬 하루오가 미소를 짓거나 걸어 다니는 순간을. 그러다가 문득 사라져버려서 나를 외롭게 만드는, 그런 순간을."

표지사진=교보문고
표지사진=교보문고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

새롭게 출범하는 에크리의 디자인은 한 편의 ‘흑백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앞표지 전면에 배치된 흑백 사진은 영화의 스틸컷을 보는 듯하다. 앞뒤로 이어지는 실선 또한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을 연상케 하며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흑백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관객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표정과 행동을 크고 분명하게 하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 역시 저자의 사유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오직 ‘쓰는’ 행위를 조명한다.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연필을 곱게 깎아 꾹꾹 눌러 쓰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는 독자들이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접해왔던 작가들의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독자들 앞에 첫선을 보인다.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는 문학평론가 김현과 이광호 시인 김혜순, 김소연, 신해욱 그리고 소설가 백민석까지 문학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해왔다.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뜻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한 이 시리즈는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