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신달자 작가가 팔순을 맞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문학과 인생을 총결산한 묵상집과 시선집을 동시에 펴냈다.

에세이집으로는 '신달자 감성 포토 에세이'에 이어 8년 만에 펴낸 신작이다. 이 묵상집에서 저자가 지난 팔십 년의 세월을 요약한 단 한 마디의 말은 의외다.

"“잘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연 1위의 말은 참담한 후회의 고백이며 반성의 축대라고 할 수 있는 이 한 마디일 것입니다. 이 한 마디는 아마도 이 책 한 권을 채울 수 있는 축약된 지도일 것입니다. 팔십 년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 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잘못하였습니다”에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도 섞여 있으니까요." (본문에서)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성공적인 이력 뒤에 여성으로서, 아내이자 엄마로서 겪어야 했던 저자의 순탄치 않은 삶을 생각할 때 다소 의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등단했지만 학업 및 결혼으로 인해 펜을 놓고 있다가 서른 살이 되어서야 첫 시집을 낼 수 있었고, 아이 셋을 낳아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룬 듯했지만 남편에 이어 시어머니까지 쓰러져 오랜 세월 병 수발을 하며 보따리 장사 등으로 가정 생계를 꾸려야 했으며, 남편이 병석에 누운 지 24년 만에 세상을 뜨자 이번에는 자신도 유방암 판정을 받고 한동안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그토록 바랐던 대학교수의 꿈도 우여곡절 끝에 50세가 되어서야 이룰 수 있었다. 책 제목처럼 말 그대로 미치고 흐느끼며 견뎌온 삶이었다.

그럼에도 잘못했다니?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는 것일까?

정호승 시인은 저자에 대해 “소담한 눈꽃의 언어로 삶을 그려내는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는데, 이 묵상집에는 낮게 엎드려 자신의 인생은 물론 이 시대 보통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 외로움과 쓸쓸함을 살갑게 어루만지고 안아주는 한층 원숙한 마음 그릇의 너비와 깊이가 오롯이 드러나 있다. 지난 시절의 과오를 통렬히 반성하는 고이자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겸허히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노년의 지혜가 전해진다.

한국 여성시를 개척한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신달자가 팔순을 맞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펴낸 시선집. 원숙한 노년의 지혜를 설파한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와 동시 출간한 이번 시선집에서 지금까지 발표한 천 편이 넘는 시 중 182편을 정선하여 새롭게 선보인다.
어느덧 팔순에 이르러 시력 60년을 총 5부로 나누어 결산한 시선집을 엮어내는 시인의 소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60여 년 한 인간의 철근 같은 감정을 누가 밀고 왔을까. 기쁨, 슬픔, 분노, 절망 그리고 폭력적인 감정들을 무엇으로 달래며 여기까지 왔을까. 억눌림을 절제라는 이름으로 달래며 죽음의 발목을 잡을 때 터지는 비명의 언어를 달래며 꾸역꾸역, 아니 가파르게 여기까지 왔다. 그 16권의 시집에서 피가 당기는 대로 여기 모셨다. 사람과 자연의 감동이 뜨겁고 아직도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自序’에서)

신달자 시인은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등단했지만 대학원 진학과 결혼 등의 이유로 시와 멀어졌다가 삼십대가 된 1973년에 첫 시집 『봉헌문자』를 발표했다. 박목월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폭넓은 인간적 공감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라고 평했는데, 이는 이후 신달자 시세계의 방향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지금까지 펴낸 열일곱 권의 시집을 통해 시인은 여성 특유의 심미감으로 “상처를 넘어서는 사랑과 헌신의 서정적 정화”를 다채롭게 구축해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신달자 시인에 대해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모든 말들이 모두 시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시선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저 거리의 암자」는 이러한 신달자 시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다. 무산 조오현 스님이 백 명도 넘는 스님들이 있는 자리에서 “너희들 수행보다 이 시 한 편이 낫다”고 말했다는 일화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문학평론가 유성호에 따르면, 이 아름다운 시편은 일상의 도심 거리에서 발견하는 성소(聖所)로서의 ‘암자’를 은유하고 있다. 어두워지는 수서역 부근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사람들은 하루 노동을 벗고 새로이 야간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은 “잡다한 번뇌”와 “구슬픈 노래”와 “빗된 농담”을 풀어가면서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신다. 생의 아픔을 토해내는 이들에게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인 셈이다. 새벽이 오면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나게 되고,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 데 / 속을 쓸어내리는 하룻밤”이 걸리고 나면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간다. 그렇게 ‘저 거리의 암자’에서 치러내는 수행을 통해 우리는 어느새 성속(聖俗)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이름을 아로새긴 존경받는 원로로서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안한 노년 생활을 즐길 법도 하지만, 시인은 팔순에 이른 지금도 펜을 놓기는커녕 시와 산문을 써서 발표하고 문예지도 만들며 문학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느긋하게 남은 생을 살겠다는” 겸손한 다짐과 달리 그의 문학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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