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운리뷰어=김우선 기자] 서울에도 꽤 유명한 사찰들이 많다. 종로 도심에 있는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를 비롯해 삼성동의 빌딩숲 사이에 있는 봉은사, 성북구의 길상사와 보문사, 강북구의 도선사와 화계사, 은평구의 진관사, 강서구의 약사사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주말,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강서구 개화산에 있는 약사사를 찾았다. 개화산은 김포공항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128미터의 야트막한 산이다. 개화산 주변으로는 11만 7천 여평의 개화산 근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개화산 둘레길이 마련되어 강서 구민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정상에 서면 좌로는 김포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우로는 굽이쳐 흐르는 한강이 내려 보인다.

사진=이로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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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민이라면 개화산은 익히 들어 알지만(근교에 있어도 시간 내서 방문하기란 쉽지 않다) 약사사라는 사찰이 있는 건 잘 모른다. 서울에 이렇게 호젓한 사찰이 있을 줄이야. 약사사는 서울 도심에서 가까운 산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아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단위로 오신 분들도 많다. 휴일에는 가족나들이 장소로도 괜찮다.

약사사 가는 길 초입. 산책로(둘레길)을 따라 20여분을 걸어가면 나온다 /사진.=이로운넷
약사사 가는 길 초입. 산책로(둘레길)을 따라 20여분을 걸어가면 나온다 /사진.=이로운넷

1486년(성종 17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약사사가 주룡산에 있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양천읍지(陽川邑誌)에 따르면 신라 때 주룡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 머물렀다 하여 주룡산(駐龍山)이라 이름하였고, 주룡 선생이 돌아간 후 기이한 꽃 한 송이가 피어 사람들이 개화산(開花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봉화를 받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開火山)으로도 불리었는데, 조선 초기 봉수대가 개화산에 설치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봉수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진=이로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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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산에 있는 사찰 약사사는 원래 개화사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후기 문신인 송인명은 이 개화사에서 공부를 하였고, 1736년에 좌의정에 오르자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절을 크게 고쳐지었던 것으로 전해져 오는데 이러한 사실은 영조때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이 송인명에게 보낸 시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사천시초(槎川詩抄)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소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조선 후기의 화가로 이름이 높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이 시를 보고 개화사(開花寺)란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리고 경교명승첩의 그림에도 개화산과 약사사가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양천팔교라 불리던 주룡산(개화산)의 개화사(약사사)는 겸재정선(당시 현감)의 시정을 불러 일으켜 많은 시화에 영감을 불어넣어준 곳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개화산과 약사사(개화사)

사진출처=겸재정선미술관

 

겸재 정선의 개화사라는 그림에도 나와 있고, 이 절에 냉천이 있어 병자가 목욕을 하면 오랜 병도 낫는 약수터라 하여 고려 말쯤부터 약사사로 불렸다고 한다. 17세기 이전의 기록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알 수 없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9호인 3층 석탑과 제40호인 석불이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이 사찰은 700~800년의 역사가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절의 규모는 서울에 있는 절 치곤 웅장해 보이지만 건물은 세 채밖에 없다. 대웅전은 1988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있다. 이 탑은 고려시대 탑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문화재로서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사진=이로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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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사의 3층 석탑은 1980년 6월 1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받았다. 지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말에서 조선초 사이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고려 말 조선 초부터 불교 미술이 서서히 쇠퇴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탑의 형태가 별다른 장식없이 최소한으로 필요한 부분만 있는 형식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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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약 4m이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지대석, 기단,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지대석은 사각형 돌 1장이다. 기단석은 그냥 큰 돌 하나이고, 기단과 탑신 사이에 있는 갑석도 평평한 돌 1장이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옥신과 옥개석은 서로 다른 돌이며 탑신 양쪽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은 총 3층인데 맨 아래 1층이 나머지 2, 3층 보다 더 높다. 받침 5단으로 구성된 옥개석은 두터우며 옥신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면적이 넓다. 받침의 처마끼리 만나는 부분과 처마 끄트머리가 올라간 각도는 완만하다못해 거의 수평이다. 제일 윗부분에는 둥근 돌 하나가 있다. 이를 제외하고 상륜부는 사라지고 없다.

약사사 대웅전 내부에 있는 불상도 이색적이다. 원래는 약사전 옆에 있던 건물 내부에 있었는데 하반신이 땅속에 묻힌 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4년에 건물을 철거하면서 드러났고 현재 대웅전 위치에 기단석을 새롭게 만들어 모셨다. 이 불상 역시 1980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받았다. 첫 등재 명칭은 '약사사 석불(藥師寺 石佛)'이었으며, 2009년 6월 4일에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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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돌로 만든 갓 모양 구조물이 있다. 얼굴은 긴 타원형이며 눈, 코는 크고 귀는 길며 입은 작다. 목없이 얼굴과 상체가 딱 붙어있다. 표정은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 상체는 부피감 없이 돌에 윤곽만 낸 형태로, 추상적인 것이 특징이다. 어깨는 각이 졌으며 마치 움추린 듯한 모습이고,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 두 손은 가슴에 붙였다. 옷주름은 몇 가닥 선으로만 묘사했다.

사진=이로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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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모양을 보고 관음보살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돌부처를 '미륵'으로 부르던 관습에 따라 미륵불로 보기도 한단다.

지난 주말에 약사사를 다녀온 이유는, 조만간 아들들의 대입 수능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평소에도 사찰 불공을 즐겨하는 아내가 집 근처에 불공을 드릴만한 곳이 없나 미리 사전 답사를 다녀온 것이다. 이곳에서의 기도가 효험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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