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 한국 생명운동과 문명전환(서울: 도서출판 풀씨, 2023)
주요섭, 한국 생명운동과 문명전환(서울: 도서출판 풀씨, 2023)

동학 2대 지도자 해월 최시형이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답한다. "길바닥에 비단이 깔릴 때".

80년대 광주항쟁을 거치고 외세와 군부독재의 폭압을 이기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며, 그 주체는 민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물론 그 혁명의 결과물이 무엇일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좌절과 해체, 대혼돈이 왔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혁명을 꿈꾸다 30년 전 ‘생명운동’을 접한 저자가 한국 생명운동 40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문명전환을 꿈꾸는 책을 내었다.

지난해 2022년은 ‘생명운동’이라는 말이 처음 문자화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립」, 일명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가 세상에 나온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시인 김지하가 기초를 하고, 장일순을 비롯한 원주캠프가 함께 읽고 수정했던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는 1982년 1월에 공개된다.

1984년 무위당 장일순 서화 ‘나는 미처 몰랐네
1984년 무위당 장일순 서화 ‘나는 미처 몰랐네

40년 전 한국의 생명운동은 처음부터 ‘문명전환’ 운동, 개벽운동이었다. 삶과 사회를 리셋(reset)하고, 물신화(物神化)된 세계관과 생활양식의 대전환, 재창조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이었다. 파국적 위기에 대한 자각과 문명전환 요구의 수용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유럽과 동유럽을 포함해 서구 문명 전체를 반생명적 문명으로 비판하며, 당시의 엄혹한 군사독재체제에 대한 회피로 의심될 수도 있었지만(저자의 표현), 근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문명전환의 열린 가능성에 주목했다.

‘생명’의 관점에서 기존 사회운동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여성운동에 생명운동이 하나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운동 전체, 나아가 제3세계 민중운동 전체의 재구성을 목표로 하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재-구성(re-construction)의 전제는 ‘세계관 재-설정(re-configuration)’. ‘생명의 세계관’, 그리고 내밀하게는 기존의 사회혁명 노선으로부터의 이탈, ‘유물론적 사회혁명’에서 ‘영성적 사회혁명’으로의 전환이다.

‘전환’은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으로서 계급과 민족, 인간의 지평을 넘어 ‘생명’의 지평을 바라본다. ‘전환’은 ‘방향바꾸기(turn)’, ‘변형(transform)’, ‘차원변화’이다. 원효의 이변비중(離邊非中), ‘양 끝을 떠나되 중간도 아니다’이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이다. ‘진보/보수’, ‘좌/우’, ‘노동/자본’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재의 삶과 사회를 구속하고 있는 기존의 세계관과 생활양식, 사고방식을 깨고 새로운 경지에 다다르는 일이다.

기존의 ‘반체제운동’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서 생명운동은 <한살림> 등의 생명협동운동으로 자리를 잡고, 삼보일배와 생명평화탁발순례, 오체투지 등으로 이어지는 생명평화운동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세, 코로나19로 대변되는 파국 앞에서 생명운동이 과연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고 있는지 저자는 묻는다. “생명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삶과 사회의 변화를 꾀하는 지속적인 사회적 활동의 체계”로 ‘생명운동’을 정의할 때 사회적 영향력, 자기생산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운동’은 부재하거나 소멸단계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사회적으로 민감하고도 뜨거운 이슈인 낙태와 동성애, 트랜스젠더와 같은 원초적 생명 이슈, 인공지능, 포스트휴먼 등에 대해 생명운동은 답하지 못한다. 나아가 생명운동엔 느낌이 없으며, 사회적인 것을 묻지 않고, 찢어짐을 두려워하고, 역설을 회피하며 자아의 분열을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생명운동’ 관련 저작에서 보기 어려웠던 자기진단이자 평가다.

자료=해월 최시형, 경북도민일보
자료=해월 최시형, 경북도민일보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한국 생명운동 다시보기 편에서는 한국 생명운동의 역사를, 2부 한국 생명사상‧생명운동 다시쓰기에서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몸, 생/명, 감응과 우형이라는 개념을, 3부 생명운동과 문명전환: 또 다른 세계의 태동에서는 코로나19시대의 생명운동을 영성을 통해 ‘또 다른’ 전복의 세계(들)에 대한 꿈꾸기를 시도한다. 특히 4장 ‘몸-생/명’은 저자의 특별한 논지를 구성하는 부분인데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생경할 수 있으나 도출되는 결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저자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서문 “생명담론은 재발명되어야 한다”에 잘 요약되어 있다. ‘종말의 감각’, ‘확실성의 종말’, ‘소환되는 생명담론’, ‘응답 없는 생명운동’, ‘한국 생명담론 다시 쓰기’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임박한 아니 이미 맞고 있는 파국적 위기에서 답하지 못하는 생명운동의 재발명, 다시쓰기다. 변혁적 생명운동에 대한 성찰, 아니 그 ‘생각을 다시 생각하는’ 성찰만으로는 자신과 세계를 변혁할 수 없으며, 생각이 끊어지는 한순간의 체험인 ‘영성’의 급진성 동원을 주문한다.

나아가 “개인화된 성찰과 영성만으로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고 새로운 시스템의 태동을 도모할 수도 없다. 더욱이 생명운동이 사회운동인 한, 공동체와 협동조합 등을 포함한 사회적 체계들을 고려하지 않은 생명운동에 대해서는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문명담론, 생태담론에 대해서도 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류, 문명, 생태와 같은 지구적 차원의 담론들은 책임을 져야 할 존재들의 책임을 면피하게 해준다. 문명담론과 생명담론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만주국 설립기에 민족적 탄압을 호도하는 이데올로기로 생산되었다. 문명사적 통찰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적인 고통을 외면하면서 전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자본의 숭상을 공동체의 핵심 이념으로, 중심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생명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비판은 저자의 현 생명운동 담론에 대한 고뇌의 산물로서 공감이 크다.

그렇다면 저자는 팬데믹-기후재난 시대 이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전환담론(transition discourse)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지속가능(sustainable) 전환담론, 둘째, 급진적(radical) 전환담론, 셋째, 파국적(catastrophic) 전환담론이다. 첫째, 지속가능 전환담론은 사실상 정부와 기업의 새로운 성장전략 및 정책으로 탄소 중립 및 그린뉴딜 정책 등이 그것이다. 둘째, 급진적 전환담론은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 등 급진적인 체계전환(체제전환, 시스템전환)을 모색하는 담론들이다. “기후변화가 아닌 시스템의 변화”(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를 기대한다. 셋째, 파국적 전환담론은 위험사회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해방적 파국론’이 적절한 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조금 결이 다른 김흥중의 ‘파국의 사회이론’, 이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개벽적 전환담론’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기타 전환적(transformative) 사회혁신이론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전환담론들의 주장처럼 세상을 전환할 수 있는 걸까? 저자의 감각으로는 비관적이다. 첫째, 지속가능 전환은 경제성장을 견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으로 읽힌다. 의미 있는 전환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 급진적 전환은 ‘어불성설(語不成說)’처럼 느껴진다. 시스템의 ‘자기-개혁’을 통한 자본주의의 ‘자기-부정’적 전환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가능성은 셋째, ‘파국적 전환’ 밖에 없는 것일까?

파국적 상황은 기존의 상(像)을 산산이 깨뜨려버린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파상(破像)과 통감(痛感)의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성이 형성되고,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의 조직화를 통해 전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전환으로 말하면, ‘파국적 전환’, ‘개벽적 전환’이다. 그런데, 이때의 전환은 “방향바꾸기”가 아니다. ‘이행’도 아니다. 탈바꿈도 아니다. ‘태동’이다.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이다. 또 다른 ‘시스템/환경’의 구성이다. 또 다른 자아(주체성)의 탄생이다.

그 전제는 복수(複數)의 세계다. 세계는 세계들이다. 하나의 우주가 아니라 다중우주다. 다중문명이다. 그러므로 파국이 된다고 해서 온 세계가 불타오르는 것은 아니다. 메인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의미이다. 지배적 문명이 몰락한다는 말이다. 거꾸로 대전환 혹은 탈바꿈이란 정치혁명과 같은 체제변혁이 아니라, 파국적 위기(危機) 속 또 다른 문명과 시스템이 생겨나는 일이다. 루만의 개념을 빌자면, 변화(變化)가 아니라 ‘분화(分化, differentiation)’이다. 새로운 시스템의 태동이다. 대전환이란 울리히 벡이나 김홍중이 말하는 것처럼 파국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지만,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전환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복수의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이다. 저자의 전환담론은 ‘태동적 전환담론’이다.

팬데믹-기후재난 시대에 필요한 것은 뉴노멀이 아니다. 새로운 가정법이다. 뉴노멀은 없다. 뉴노멀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질 뿐이다. 지금 만들어가야 할 ‘과정기획’이다. 이제 우리는 먼저, 자신(自身)의 욕망과 소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행동하고 싶은 저자의 사회적 염원은 ‘비-자본주의’ 네트워크다. 만인-만국의 비-자본주의여, 연대하자!‘이다. 자본주의 아닌 것, 그것을 꼭 집어서 하나를 말하라면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수많은 비-자본주의를 살고 있다. 친구 밥 사주기, 공짜로 잠 재워주기, 연애하며 무조건 선물하기, 고향에서 삼촌한테 고추 받고 용돈으로 돌려주기, 협동조합 만들기, 공동체 가입하기 등등. 또한, 수많은 비-자본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개인주의, 정신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영성주의 등등.

수운 최제우의 ‘각비(覺非)’와 ‘불연기연(不然其然)’의 깨달음이 떠오른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담론적 실천이기도 하지만,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를 실감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지평을 여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던, 언제든지 ‘현재화(顯在化)’될 준비를 하고 있던 ‘잠재성’의 세계다. 수많은 ‘기연들(이러함들)’로 나타날 준비가 되어있는 ‘불연(아직 아님)’의 세계다. ‘아니다’의 세계엔 무궁무궁한 또 다른 삶들이 있다. 우리 안에 있었고, 있을 예정이다. 문명전환의 대안사회는 우리 안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1~2년 사이 여러 공부 모임과 매체에 발표한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논지의 중복과 부연이 있다. 하지만 40년 전 문명전환을 주창하며 등장했던 ‘생명운동’이 오늘의 시대적 요구에 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 운동가의 절박하고도 절절한 자기고백이자 출사표다.

※ 본 서평은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웹진 '正道精進'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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