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는 그릇에 내용물을 다시 채운다는 뜻의 ‘리필(refill)’은 흔히 음식이나 음료를 더 먹을 때 사용되곤 했다. 지구를 지키는 일에 ‘리필’을 활용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사용하는 샴푸나 세제를 빈 통에 다시 채워 사용하는 일에 힘쓰는 예비사회적기업이 있다.
‘지구자판기’는 샴푸·세제를 리필할 수 있는 자판기를 운영하는 소셜벤처다. 평소 샴푸·세제를 리필할 수 있는 리필 스테이션을 이용하는 소비자였던 서사라 대표가 기존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기업을 설립했다. 중앙대학교에서 친구들끼리 리필 스테이션 부스를 만들며 첫 활동을 시작했고, 자판기라는 아이디어를 접목해 2020년 8월 본격적으로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보다 환경보호 문화가 한발 앞선 유럽 국가에서는 세제뿐만 아니라 식료품 등 다양한 제품을 리필로 구매할 수 있는 매장들이 많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샴푸·세제를 중심로 리필이 가능한 매장이 생겨나는 중이다. 2020년 10개 내외였던 리필 스테이션 매장(숍인숍 포함)은 지난해 기준 전국에 80개 이상으로 8배나 늘어나는 등 소비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전국의 소비자들이 모두 이용하기에 매장이 턱없이 적어 리필 스테이션을 이용하려면 빈 통을 들고 먼 곳까지 방문해야 한다는 점이 불편함으로 꼽혔다. 서 대표는 ‘우리 집 앞에도 리필 스테이션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자판기를 떠올렸고, 창업 아이템으로 연결했다.
“저같이 불편을 감수하며 리필을 하고 있는 사람들, 리필을 하고 싶지만 불편해서 한 번도 하지 못한 사람들, 리필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들 모두가 지구자판기를 통해 리필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창업을 해서 직접 리필 문화를 알리자’라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리필을 하면 어떤 점에서 우리 사회에 이로울까? 먼저 재활용이 어려운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샴푸·세제 플라스틱 용기는 색깔이 있거나 라벨이 붙어있거나 잔여물이 용기가 묻어있는 등 이유로 분리배출을 해도 재활용이 거의 되지 않는다. 한 번만 사용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용기를 리필을 통해 여러 번 재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환경을 보호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 환경을 지키는 일을 보통 어렵고 귀찮고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지구자판기는 환경을 보호하기가 쉽고 재미있고 비싸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서 대표는 “리필을 문화로 만들어 환경보호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바꾸고, 더 나아가 기업과 국가의 의식까지 바꿔 가려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구자판기는 사업 초기 종이상자로 자판기를 만들어 직접 소비자를 만나며 의견을 듣고 테스트를 거쳐 현재의 자판기를 자체 개발했다. 자판기에서 원하는 제품을 선택하고 QR코드를 통해 결제를 한 뒤, 리필 용기를 구멍 가까이에 대고 액체를 채우는 방식이다. 현재 서울 대방동 스페이스 살림에 1대가 설치돼 있으며, 총 8번의 대여를 진행해 2000여 명의 소비자가 지구자판기를 통해 리필을 경험했다.
지구자판기는 집과 가까운 곳에서 언제나 리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자판기를 통해 판매되는 세제도 전부 친환경 제품이고 100ml당 700~1000원 정도로 저렴하게 구입이 가능하다. 특히 리필의 과정 자체를 한눈에 볼 수 있어 교육용으로도 좋다. 자판기 판매‧대여뿐만 아니라 환경을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와 교육에도 참여해 여태껏 총 50회 이상 행사를 진행해 3000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향후 지구자판기는 현재 자판기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 대기업과의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사용성이 향상된 모델을 선보일 예정이다. 아울러 대학교 기숙사, 아파트 단지 등 생활공간과 가까운 곳에 자판기 설치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 대표는 “지구자판기 트럭에서는 리필뿐 아니라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으니 많은 기업과 기관, 단체에서 불러주시면 찾아가겠다”고 강조했다.
중앙대 화학신소재공학부를 2학년까지 다니다가 휴학 후 지구자판기에 집중하고 있는 서 대표는 당분간 학업을 잠시 쉬어가고 기업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다. 얼마 전에는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인증을 받는 등 지구자판기 활약 범위도 더 넓어지고 있다.
“우리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누구나 지구를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경영이라는 아랫단의 목표가 따릅니다. 우리 사회에 리필 문화를 만들고, 지구를 지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