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구 스탠더드 오일 빌딩 입구 장식. 석유 시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구 스탠더드 오일 빌딩 입구 장식. 석유 시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금융지구 중심에는 구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 빌딩이 웅장하게 서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스탠더드 오일은 한때 한화 500조원대 규모의 자산을 보유했던 석유 왕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의 기업이다. 1922년 완공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이 건물은 100년 동안 금융지구의 한복판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는 마치 골드러시 이후 미국과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검은 황금, 석유의 위용을 상징하는 듯하다. 

1928년 시리즈 10달러 금화태환권(Gold Certificate). 금으로 교환 가능함을 보증하는 금색 마크가 새겨져 있다. © National Numismatic Collectio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1928년 시리즈 10달러 금화태환권(Gold Certificate). 금으로 교환 가능함을 보증하는 금색 마크가 새겨져 있다. © National Numismatic Collectio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1971년은 국제 금융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시점이다. 미국이 금태환 포기를 선언하면서 금과 연동해 있던 미국 달러 시스템이 전무후무한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언제든 금과 교환 가능하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인정받던 달러가 사실상 그냥 조폐국에서 마구 발행하는 종이 조각으로 전락한 것이다. 황금이라는 영원불변의 절대자와 결별한 미국 달러는 이를 대신할 파트너로서 석유를 택했다.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결탁하면서, 석유를 사기 위해서 반드시 미국 달러를 사용해야만 하는 페트로 달러(Petro-Dollar)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금으로 바꿔주지도 않는 달러는 현대 생활에 필수적인 석유 수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통화가 되어 세계 경제에 다시 군림하게 된다. 오늘날까지 미국이 달러를 무한정 찍어내며 돈 잔치를 하는 동안, 열심히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는 나라들은 어쩌면 그저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녹색 휴지 조각을 벌어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샌프란시스코 조폐국 민트마크 ‘S’가 새겨진 수집용 주화(25센트)
샌프란시스코 조폐국 민트마크 ‘S’가 새겨진 수집용 주화(25센트)

한때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대를 눈부시게 빛낸 샌프란시스코 조폐국은 1937년 세 번째 건물을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축물 자체는 단순한 직육면체 모양으로 여타 미국의 조폐국의 외관과 큰 차이가 없으나 높은 언덕에 자리한 탓에 웅장한 성채를 보는 듯하다. 미국의 여러 조폐국들은 그들이 생산하는 동전에 각자 고유의 민트마크(mintmark)를 부여하는데, 이 샌프란시스코 조폐국에서 발행되는 동전에는 도시의 이니셜을 딴 ‘S’가 새겨진다.

흥미롭게도 이 곳 현지에서도 해당 민트마크를 지닌 동전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실제 미국에서 생활하며 접하게 되는 동전에서는 ‘D’와 ‘P’, 즉 콜로라도 주 덴버(Denver)와 펜실베니아 주 필라데피아(Philadelphia) 조폐국의 마크가 주로 확인된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조폐국이 1975년 이래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수집용 주화 발행만을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더라도 소수의 컬렉터가 아니라면 샌프란시스코 조폐국 발행 주화를 한번 만져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조폐국은 1987년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소수의 방문객을 허용한 것을 제외하면 일반인의 접근조차 금지되어 있다. 뭐랄까, 석유 구매라는 배타적 목적을 위해 철옹성처럼 군림하고 있는 미국 달러 시스템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현 샌프란시스코 조폐국​
​현 샌프란시스코 조폐국​

현 샌프란시스코 조폐국은 시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마켓 스트리트와 인접해 있다. 마켓 스트리트는 시민들의 출퇴근과 쇼핑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로이기 때문에 조폐국 인근에는 월그린, 세이프웨이와 같은 대형 슈퍼마켓들이 여럿 자리해있다.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바라보자면 저 거대한 성채와도 같은 조폐국 건물이 마치 시민들의 일상적 상거래를 굽어보는 듯하는 느낌마저 든다.

황금의 신기루가 가고 석유의 패권이 도래하는 긴 역사의 진동과 불길을 뚫고 살아남은 조폐국은 이제 슈퍼맨인냥 ‘S’ 마크를 새긴 코인을 뿜어낸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장바구니와 세계 금융자본주의를 관통하여, 이 슈퍼 파워 미국 화폐들은 오늘도 내일도 세계 경제를 견인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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