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일청, 일로의 양 전역을 지나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을 겪는 동안 우리의 발길은 대륙에 힘차게 드듸서게 되었으니 여기 일본의 뻐더가는 생장 발전의 힘참 거름을 볼 수 있거니와 이제 2천 6백년 2월 11일 기원을 당하와는 천황, 황후 양 폐하와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천태자 전하, 의궁친왕 전하, 조궁, 효궁, 순궁, 청궁 4대친왕 전하의 어강녕을 빌어 마지안는다.... 이 전국적 제전에 임하여 오인은 국운의 창성과 황군장병의 무운장구를 삼가 기원하여 마지안는 바이다(조광 3월호 봉축 2천 6백년의 기원절(紀元節))

잡지 《조광》 내용 중 일부다. 기원절은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를 기점으로 연도를 세는 기년법이다. 한국으로 치면 단군기원에 해당하며 황기(皇紀), 황력(皇曆)이라고도 부른다. 기원절 2600년은 양력으로 1940년이었다. 1936년 베를린에 이어 도쿄가 올림픽을 유치한 배경이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히틀러, 무솔리니,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 등과 긴밀히 접촉하는 등 외교력을 총동원한 일본이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베이징 노구교 다리에서 울린 총성과 함께 도쿄올림픽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노구교사건으로 발생한 중국과 일본의 충돌이 중일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 내 군국주의 세력이 득세했고 일본은 전시체제에 돌입한다.

평화제전 올림픽 개최를 앞둔 국가가 주변국과 전쟁에 몰두하는 상황,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셌고 일본은 노구교사건 1년 만인 1938년 7월 올림픽 개최를 포기한다. 어차피 올림픽 관련 예산을 전쟁 자금으로 끌어다 쓴지라 대회 준비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다.

1940 도쿄 올림픽 개최 포스터.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출처=위키커먼스
1940 도쿄 올림픽 개최 포스터.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출처=위키커먼스

한국체육 명맥을 이은 축구협회
전쟁을 최우선에 둔 일본은 식민지 단속에 나섰다. 내선일체를 위해 신사참배를 강제하기 시작했고 일본어·일본사 수업도 늘렸다. 반대로 조선어 수업은 선택과목으로 격하, 사실상 폐지한다. 이때 교육은 “국민도덕을 함양함으로써 충량유위(忠良有爲)의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육군특별지원병령을 시행해 식민지 조선인을 군대에 입대시키기 시작했고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해 노동력과 물자를 수탈해 갔다. 끌어다 쓸 수 있으면 모든 게 전쟁 도구였다.
 
사정은 체육계라고 다르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스포츠는 앞으로 올림픽 종목이나 승패를 가르는 운동경기는 폐지하고 전투력 증강을 위한 경기를 해야 한다”라고 방침을 정한다. 당시 조선체육회는 1936 베를린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을 발판으로 도쿄올림픽에 더 많은 선수를 출전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조선체육회가 존속해도 총검술, 사격기본훈련 등 군사훈련 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사실상 사형선고였다. 조선체육회는 1938년 7월 4일 조선일보 회의실에서 긴급 이사회를 가진 후 일본인 단체 조선체육협회로 흡수된다.

일제는 전쟁을 위해 물적, 인적자원을 총동원했다. 스포츠는 군사훈련을 위한 도구였고 학교에서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사진은 체육시간에 군사훈련을 하는 양정고보 학생들./출처= 대한체육 100년사 Ⅱ 464p
일제는 전쟁을 위해 물적, 인적자원을 총동원했다. 스포츠는 군사훈련을 위한 도구였고 학교에서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사진은 체육시간에 군사훈련을 하는 양정고보 학생들./출처= 대한체육 100년사 Ⅱ 464p

그나마 조선축구협회가 산하 단체로 편입돼 조직 해산을 피할 수 있었다. 이때 취임한 고원훈 제3대 조선축구협회장은 조선체육회 발기인, 초대 이사장,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체육계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조선총독부 자문 기관이었던 중추원 참의도 역임한 인물이었다. 축구협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조선축구협회는 그 해 11월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대회를 제19회로 명명한다. 기존 전조선종합경기대회 명맥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였다. 한국체육 전체를 어깨에 짊어지고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함흥이 경성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일곡사건’으로 대회 중단, 끊어진 한국체육 명맥
평양 일본곡물산업 축구단. 줄여서 ‘평양일곡’이라고 불리던 팀이다. 이름은 일본곡물산업이지만 선수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평양일곡이 1941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2회 메이지신궁대회에 조선지역 대표로 참가해 우승한다. 3:2로 역전하며 거둔 짜릿한 우승, 현장에서 응원하던 도쿄 유학생과 거류민이 몰려나와 선수들을 헹가래쳤고 경기장에는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가뜩이나 전쟁을 치르며 예민하던 일본에게는 일개 식민지 조선인이 신성한 메이지신궁대회의 존엄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일본은 몽니를 부렸고 고원훈 회장이 대회 우승기를 반환, 조선총독부에 유감의 뜻을 전하며 수습에 나선다. 하지만 국내에도 여파가 이어져 11월 22일 예정돼 있던 제22회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가 중단된다. 조선축구협회가 살얼음판을 걸으며 이어오던 한국체육의 명맥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체육 명맥을 이어가던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는 일제의 강압에 자진해산한다. 해산 당시 축구협회 임직원들./출처=대한축구협회
한국체육 명맥을 이어가던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는 일제의 강압에 자진해산한다. 해산 당시 축구협회 임직원들./출처=대한축구협회

전쟁광기, 한국체육을 빨아들인 블랙홀
축구대회가 중단되며 한국체육 명맥이 끊어진 다음 달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기지를 공습하며 전선을 확장한다. 400명 내외에 머무르던 조선인 지원병은 이즈음부터 3000명을 넘어섰고 1943년에는 6000명을 넘기는 지경에 이른다. 모병을 위해 강제와 회유가 동원됐고 궁핍함을 벗어나고자 어쩔 수 없이 입대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몇몇 지식인들은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일본 천왕이 반도인에게 부여한 크나큰 영광”, “조선의 청소년은 일본 전체의 무거운 사명, 대동아 전체를 껴안는 야심을 가져야 한다”, “아들, 오라비, 남편, 오빠는 임금님의 것이니 지원병으로 보내”라며 말과 글로 시민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일본의 전쟁광기가 모든 걸 빨아들였던 1940년대. 한국축구, 한국체육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본은 체육계를 더욱 강하게 통제하고자 조선체육진흥회를 만들어 조선에 남아있던 모든 체육단체를 흡수해 버린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단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조선축구협회는 1942년 2월 22일 자진 해산한다. 한국 체육이 사실상 절멸하는 순간이었다. 숨통은 1945년 8월 15일에 이르러서야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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