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빌바오(Bilbao)’. 도시혁신, 도시재생 사례를 좇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찾아봤을 곳이다. 15세기부터 공업 도시이자 항구 도시로 성장했던 빌바오는 한때 크게 쇠락했던 역사가 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며 철강·조선산업의 중심지가 아시아로 넘어가고, 빌바오는 침체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와 대홍수까지 겪으며 빌바오는 ‘죽음의 도시’라고까지 불렸다.

가라앉은 빌바오를 일으킨 데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공이 크다. 바스크 지역 재력가들과 정치인들이 합심한 결과 1997년 미술관 유치에 성공했고, 이는 빌바오의 상징물로 우뚝 선다. 전에 없던 관광객이 찾아들며 미술관 옆 네르비온 강 중심으로 거리가 살아나고, 덩달아 교통이 발달했으며, 점차 실업률이 떨어졌다. 이러한 사례는 상징문화시설을 통해 지역을 살린다는 의미를 지닌 ‘빌바오 효과’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빌바오는 현재 스페인 내에서 재정자립도가 높은 부유한 도시로 통한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전경./출처=FMGB Guggenheim Bilbao Museoa, 2022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전경./출처=FMGB Guggenheim Bilbao Museoa, 2022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문화산업 유치는 시작이었을 뿐. 빌바오는 이를 기반으로 내실을 다지는 데 힘썼다. 지하철과 트램 같은 대중교통을 발달시켰고, 보행로를 확대했다. 오염된 강을 살려 수질을 높였고, 바스크 지역 민관협력 싱크탱크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와 지역 개발 공공기관 '빌바오 리아 2000' 등의 활약으로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고민과 실행을 끊임없이 해왔다.

이런 역사 때문일까.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능동성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DNA처럼 각인돼있는 듯하다. BBK 재단이 만든 빌바오 사회혁신센터 BBK Kuna(BBK 쿠나)가 바로 그 예다. 지난해 새로 설립돼 지역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회혁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라는 현지 거주민의 제보를 듣고, 기자는 지난 10월 직접 현장을 찾았다.

빌바오 라 비에하 한복판에 있는 BBK 쿠나 건물 전경. 2층 정중앙에 두 아이를 돌보는 보호자를 나타낸 조각상이 있다. 공간 대관도 가능하다.
빌바오 라 비에하 한복판에 있는 BBK 쿠나 건물 전경. 2층 정중앙에 두 아이를 돌보는 보호자를 나타낸 조각상이 있다. 공간 대관도 가능하다.

100년 된 돌봄시설에서 사회혁신 공간으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약 2.3km 떨어진 구시가지 도로변에 있는 BBK 쿠나. 오렌지빛을 띠는 지상 4층짜리 모더니즘 건물의 외관 정중앙에는 두 아이를 돌보는 보호자를 나타낸 조각상이 서 있다. 건물이 과거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려주는 조형물이다.

BBK 쿠나의 옛 이름은 ‘카사 쿠나(Casa Cuna)’. 직역하면 ‘요람의 집’이다. 이 이름을 갖게 된 건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내란 후 빌바오가 급진적 변화를 겪던 19세기 후반, 도시 근처에서는 광산 개발 붐이 일고 산업이 발달해 일자리를 찾는 이민자가 많아졌다. 대부분 맞벌이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부부들이었다.

카사 쿠나는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맡길 공간이 필요했던 가족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공 돌봄 센터였다. 당시 BBK 재단의 전신인 빌바오 저축은행(Caja de Ahorros y Monte de Piedad Municipal de Bilbao)의 후원으로, 바스크 지방 건축가 리카르도 바스티다(Ricardo Bastida)가 설계해 지었다. 현재 BBK 재단은 바스크 지방 은행 쿠차방코(Kutxabank)의 대주주(57% 지분 소유)이며, 배당금으로 ①포용·평등·참여 ②문화 ③기업가정신 및 교육 ④환경 등에 관련된 사회목적사업을 한다.

그러니 카사 쿠나는 20세기 초부터 ‘일-가정 양립’에 기여한 혁신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설립 이후 지역 아동 돌봄의 거점으로 자리 잡아 100년 동안 지역에서 활약해왔다. 이날 기자에게 건물의 역사를 소개해준 아이더 이눈시아가(Eider Inunciaga) BBK 쿠나 디렉터의 설명에 의하면 카사 쿠나는 돌봄뿐만 아니라 의료·복지와 관련된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고.

돌봄센터가 사회혁신센터로 탈바꿈한 건 최근의 일이다. 2016년 BBK 재단은 카사 쿠나의 역할이 다했다고 판단해 문을 닫았다. 시대가 발달하면서 아이들을 돌볼 센터가 많아졌으니,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겠다는 목적에서다. BBK 재단은 공간 활용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고, 약 35개의 제안서가 접수됐다. 접수된 제안서 중 지금의 지역 사회혁신 활성화 모델이 채택돼, 2021년 새로 문을 연 것이다.

아이더 이눈시아가(Eider Inunciaga) BBK 쿠나 디렉터.
아이더 이눈시아가(Eider Inunciaga) BBK 쿠나 디렉터.

누구에게나 개방된,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위한 공간

BBK 쿠나의 부제는 ‘지속가능발전목표의 공간(Garapen jasangarrirako helburuen etxea)’이다. 건물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형 모니터의 첫 화면에 이같이 적혀있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란 세계 빈곤을 종식하고 지구를 보호하며, 2030년까지 모든 사람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2015년 UN에서 채택한 목표다. BBK 쿠나 각 층 곳곳에는 개별 지속가능발전목표(SDGs)가 담긴 이미지와 설명글이 방문객을 반긴다. 이눈시아가 디렉터는 “더 나은 지역사회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BBK 재단은 지속 가능한 발전에 초점을 맞춘 2030년 UN 목표에 따라 일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모인 20명의 전문가로 이뤄진 싱크탱크(BBK Kuna Institutoa)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각 층(위에서부터 4층, 1층)과 계단에 있는 SDGs 관련 조형물과 관련 설명.
각 층(위에서부터 4층, 1층)과 계단에 있는 SDGs 관련 조형물과 관련 설명.

이눈시아가 디렉터를 따라 들어간 지하 1층은 소규모 전시회를 위한 공간으로, 전시회뿐만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이나 회의로도 활용할 수 있다. 기자가 갔을 때는 지역 아동들의 작품 전시회를 준비 중이었다. 최근에는 지속가능한 패션을 위한 전시회도 열었다고. 1층은 주민들이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도록 카페테리아를 설치했고, 공간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는 각종 패널과 구조물을 세워놨다. 2층은 BBK 쿠나의 각종 협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컨소시엄이 활용할 수 있는 공유 오피스이며, 3층은 BBK 쿠나가 제공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는 강의 공간이다. 4층에는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무대와 연습 공간이 펼쳐진다.

BBK 쿠나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 중인 청년들.
BBK 쿠나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 중인 청년들.

이눈시아가 디렉터는 “BBK 쿠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속가능발전목표와 관계돼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회사·대학·주민·단체 등 다양한 지역 내 이해관계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사회 문제에 대응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한다고 설명했다. 시민 참여형 모델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이러한 노력은 주민자문위원회(Consejo Consultivo del Barrio) 설립으로도 이어졌다.

"근방에 있는 집마다 편지를 보냈습니다. 총 1만 1000명을 대상으로, 위원회 위원으로 지원해달라고요. 그 결과 100여명으로부터 참여하고 싶다는 답변이 왔고, 저희는 그중 21명을 추첨했습니다. 84세 정신과 의사, 65세 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BBK 쿠나와 함께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협력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년의 위원회 임기가 끝났으니, 내년에는 또 새로운 위원회와 함께 끌어나갈 것입니다."

주민자문위원회의 활동 현장./사진=BBK 쿠나

2021년 9월에 문을 열어 올해 1주년을 맞이한 BBK 쿠나의 활동은 건물 안에서 한정되지 않는다. 이미 지역 곳곳에서 각종 캠페인을 주도했다. 지난해에는 하이퍼리얼리즘 조각가 루벤 오로즈코(Ruben Orozco)와 협업해 구겐하임 미술관 옆 네르비온 강에 수면 위로 얼굴만 간신히 내민 여자아이 조각상을 설치했다. 강 수위에 따라 노출 면적이 달라지는 해당 작품은 기후위기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올해는 시내 극장 앞에 큰 조형물을 설치해 우리 시대의 소비, 재활용, 대중교통 이용 등 환경 보호를 위해 할 수 있는 개인 단위 활동의 필요성을 조명했다.

남녀노소 모든 이에게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알리고, 실천하기 위해 빌바오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BBK 쿠나. 카사 쿠나 시절부터 시작된 100년이 넘은 선한 영향력을 앞으로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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