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닌 서촌. 건축사 사무소 ‘지랩’은 이곳에 작업 공간 하나를 차린다. 이 작업 공간은 곧 12개의 스테이(stay, 숙소)를 세우고, 서점 ‘한권의 서점’, 메이커스페이스 ‘서촌창작소’, 편집샵 ‘서촌도감’ 등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공간도 만든다. 전통 한옥과 현대 공간의 조화를 통해 서촌을 브랜딩했다. 스테이를 예약한 방문객은 과거 독립운동가와 예술가들의 공간이었던 서촌을 거닐며 새로운 방식의 ‘호캉스’를 즐긴다.

27일 열린 공정관광포럼 제4회 월례포럼은 지역에서 마을호텔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다뤘다. 마을호텔은 도시재생 방법론 중 하나로, 노후되거나 쇠락한 마을 전체를 ‘호텔화’하는 모델이다. 목 좋은 곳에 들어선 높은 호텔에 콕 틀어박히는 호캉스 개념에서 벗어나, 방문객이 마을을 호텔 삼고 골목길을 엘리베이터 삼아 지역 구석구석의 매력에 폭 빠지게 하자는 취지다.

김희수 서울시립대학교 연구원이 설명하는 기존 호텔과 마을호텔의 차이./출처=공정관광포럼
김희수 서울시립대학교 연구원이 설명하는 기존 호텔과 마을호텔의 차이./출처=공정관광포럼

이날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희수 서울시립대학교 연구원은 마을호텔의 특징에 대해 “하나의 높은 건물 안에 숙박과 서비스 시설을 갖춘 기존 호텔과 달리, 여러 건물을 연결해 수평적 구조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최근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의 도서 '마을에 살다 마음을 있다'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마을에 살다 마음을 있다'는 국내 6개 마을호텔 건립분투기를 다룬 책으로, ▲공주시 봉황동 ‘마을스테이 제민천’ ▲군산시 영화동 ‘후즈데어’ ▲서울시 종로구 ‘서촌유희’ ▲전주시 노송동 ‘별의별하우스’ ▲정선군 고한읍 ‘마을호텔18번가’ ▲하동군 악양면 ‘놀루와’ 등 전국 마을호텔 사례를 소개한다. 이들은 각각 협동조합, 주식회사, 비영리법인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된다.

김 연구원은 마을호텔이 지역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기존 건물과 장소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장소와 장소, 마을과 방문객, 주민들이 연결돼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관광의 특성상 소비의 연쇄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에 공정관광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어 강원도 정선에서 ‘마을호텔18번가’를 운영하는 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의 김진용 상임이사가 마을호텔이 정선 고한에 가져온 변화를 소개했다.

“탄광 산업이 문을 닫은 후, 2000년대 정선에서는 리조트 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정선 아리랑, 오일장 등 문화 자원에 힘입어 연 방문객 1000만명을 달성했죠. 그런데도 1995년 1만여명에 이르던 마을 주민은 현재 4400여명으로 인구가 감소했어요. 수조원 단위의 개발 사업도 인구 감소를 막지는 못했던 거죠. 빈집이 늘고 슬럼화가 진행됐어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자성과 주민주도 마을 재생에 대한 공감대 확산이 마을호텔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진용 상임이사는 2017년, 고한의 한 빈집을 사들여 리모델링하고, 마을 변신을 위한 거점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어 청년 창업 공간 ‘이음플랫폼’을 개소하고, 같은 뜻을 가진 주민들을 모았다. 이듬해 마을 이반장 및 관련 전문가 총 24명을 중심으로 ‘고한 18리 마을만들기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들은 노후주택 리모델링부터 골목길 정원박람회 개최, 마을사진관 설립, 공예카페 창업, 마을호텔 2호점 개소까지 이뤄냈다. 주민이 모은 재료비 300만원으로 시작해 강원도 폐공가 공간재생사업, 국토부 소규모 재생사업 등에 선정되며 날개를 달았다. 이제는 도시재생 모범사례로 꼽히며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고, 방송에도 나온다.

마을호텔18번가 사례를 설명 중인 김진용 상임이사./출처=공정관광포럼
마을호텔18번가 사례를 설명 중인 김진용 상임이사./출처=공정관광포럼

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은 마을호텔 설립을 추진했던 11명의 상가 사장들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주민이 호텔리어가 되는 마을호텔18번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단순한 숙박업을 넘어 정선 여행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마을상점과 공유공간이 호텔 부대시설 역할을 하면서 방문객을 끌어모은다는 김 상임이사의 설명이다.

김 상임이사는 “초기에는 재개발을 원하는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빈집이 더 많아져야 재개발 가능성이 커지는데, ‘재생’을 외치며 죽은 골목을 살리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는 “그런 이유로 2019년 정원박람회나 공연을 진행할 때만 해도 시끄럽다고 항의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1년 후에는 이들도 대부분 마음을 돌렸다”며 “‘재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거였구나’라고 느끼는 분들이 많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발표자들은 마을호텔 사례의 확대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섣부른 제도화는 경계했다. 김희수 연구원은 "책에 소개한 사례들은 매력적인 핵심 공간과 콘텐츠가 먼저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건 부처나 지자체가 제도화한다고 생겨나는 것들이 아니다. 공모 사업으로 만드는 일은 취지는 좋지만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진용 상임이사는 이미 지역에 잘 자리잡은 마을기업 제도 등을 활용하면 된다며 "공무원이 주민보다 먼저 나서면 판이 어그러질 수 있다. 아직 마을호텔이 제도화를 서두를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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