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영 회장이 ‘할렐루야’ 팀을 갖고 있으니 이번에는 선경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팀을 만들면 되겠습니다.”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과 새마을 성금에 기탁한 기업인이 저녁을 나눈 청와대 만찬 자리, 최순영 대한축구협회장이 “축구활성화를 위한 프로리그 창립에 힘써 달라” 요청했고 대통령은 선경그룹(현 SK) 최종현 회장에게 농을 던지는 것으로 답했다.

권력자의 농담을 농담으로만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시,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이 갓 인수한 석유공사 프로축구단, ‘석유공사 코끼리’를 창단하며 프로축구리그 창설에 힘을 보탰다. 한국축구 첫 프로축구단 할렐루야FC를 창단한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제2 프로축구단 석유공사 코끼리를 창단한 SK 최종현 회장, 그리고 프로스포츠 시대를 밀어붙인 전두환 대통령. 한국 프로축구의 ‘첫 번째’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 이날 청와대 만찬자리에 한데 모였다.

해방 후 한국축구는 늘 시대의 권력자와 함께 했다. 이승만 정권이던 1952년 대통령배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971년 박정희 대통령 이름을 딴 축구대회(박스컵)가 생겼다. 그리고 맞이한 1980년대. 정권은 치부를 감추고자 3S(Screen, Sports, Sex)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프로스포츠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연다.

당시의 권력자는 축구광이었다. 대구공고 시절부터 축구를 했고 육사에서도 공부보다는 스포츠, 특히 축구를 즐겼다. 한가한 시간이면 중계까지 챙겨볼 정도였지만 축구의 프로화에는 별다른 언급없이 소극적이었다. 5공화국 전가의 보도였던 ‘팔유팔파’(8688.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을 뜻함)와 프로야구 출범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중학생들의 체력 향상과 스포츠 활동의 기본 기능을 닦아 86아시안게임이나 88올림픽경기에 주역을 담당하게 하는 데 의의를 둔다”는 글귀를 체육교과서에 집어넣을 정도로 정권은 국제대회 개최 및 홍보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프로스포츠는 고교야구의 높은 인기, 야구경기 특성상 TV 중계에 광고를 붙이기 용이하다는 점을 발판삼아 '프로야구 출범'에 가장 먼저 몰두했다. 

야구와 축구를 동시에 프로화할 경우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우려에 프로축구는 프로야구가 정착한 후 때를 봐서 출범코자 했다. 하지만 프로리그 창설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한축구협회장에 오른 최순영 회장을 비롯해 축구인들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 이듬해인 1983년 5월 8일, 프로축구 시대가 프로야구에 바투 열린다.

한국축구 최초의 프로축구리그(슈퍼리그)가 출범한 1983년 5월 8일의 동대문운동장./출처=대한축구협회
한국축구 최초의 프로축구리그(슈퍼리그)가 출범한 1983년 5월 8일의 동대문운동장./출처=대한축구협회

역사적인 프로축구 개막전 주인공은 할렐루야와 유공. 그래도 명색이 프로리그라면 반드시 두 팀이 맞붙어야 했다. 두 팀 말고는 프로팀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가 고작 두 팀인 프로리그에 구색을 갖추고자 실업팀(포항제철돌핀스, 대우로얄즈, 국민은행까치)을 끌어왔다. “아마추어팀이 프로로 전향할 의사를 보일 때는 슈퍼리그(프로리그)에 존속시켜 프로축구 창단의 촉진제 역할을 하기로 했다”, “프로와 아마의 공동발전을 꾀하고 다가올 본격 프로시대의 전진기지를 마련한다는 데 뜻을 두고 있다”는 당시 보도 내용은 프로리그가 얼마나 졸속으로 출발했는지 보여준다.

프로리그 원년 우승팀은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의 할렐루야FC. 팀 이름에서 드러나듯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가 쌓아 올린 여의도 63빌딩 외관이 기도하는 신자의 손을 형상화 했다하니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케 한다. 오죽했으면 할렐루야 축구단 창단 무렵 선수구성도 ‘세례교인에 한정’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할렐루야 외치게 만드는 이 조건은 선수모집이 시원찮았는지 ‘앞으로 믿음을 갖게 될 선수’로 유연하게 확대된다.

할렐루야의 연고지는 강원, 충남, 충북. 말이 좋아 연고지지 어느 곳도 연고지가 아니라는 의미다. 참고로 또 다른 프로팀 유공은 서울, 경기, 인천을 연고로 했다. 리그 자체도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축구 붐을 조성하고, 1984년에는 더 많은 구단들 참가를 유도하겠다’는 계획아래 서울에서 시작해 마산에서 마무리, 전국 9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렸으니 참가팀의 연고지는 그냥 명목이었다.

프로리그 개막식에 참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 체육입국을 내세운 5공화국은 스포츠 공화국이었다./출처=국가기록원
프로리그 개막식에 참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 체육입국을 내세운 5공화국은 스포츠 공화국이었다./출처=국가기록원

축구 본연의 가치에 따르면 각 팀의 지역정착과 상호교류 증대, 이를 통한 전반적인 실력 및 팬들의 관심 증대를 거쳐 프로화가 이루어진다. 그나마 유공이 서울, 부천을 거쳐 제주유나이티드란 이름으로 제주에 정착한 것과 달리, 할렐루야는 세 시즌을 치른 후 돌연 ‘선교활동에 중점을 두겠다’며 프로팀을 아마추어팀으로 전환했고 이마저도 1998년 해체해 버린다. 특정 지역의 팀이라는 연고의식이 프로리그 제1원칙임을 생각해보면 K리그 원년 우승팀 연고지를 특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해서 한국프로축구의 첫 우승 트로피는 특정 지역, 도시가 아니라 주님의 품에 있다.

그리고 FA컵은 축구의 지역 정착 후 프로리그 출범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발전의 가장 앞에 있는 대회다. 하지만 과정을 차례대로 거치지 않고 권력자의 뜻에 따라 휘뚜루마뚜루 탄생한 프로리그. 이런 와중이니 FA컵(전국축구선수권대회)을 실업, 대학 등 아마추어팀만 참가하는 프로팀과 상관없는 별개 대회로 인식했고, 참가 제한을 두지 않고 ‘프로와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하는 열린 방식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FA컵) 취지가 제대로 구현된 것도 프로리그 출범 후 5년이 지난 198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리그 2년차(1984) 대우로얄즈와 할렐루야의 경기장면. 이 해부터 대우와 포항제철이 프로팀으로 전환해 참가했고 현대와 럭키금성이 프로팀을 창단, 리그에 참가하며 내실을 다져나갔다./출처=대한축구협회
리그 2년차(1984) 대우로얄즈와 할렐루야의 경기장면. 이 해부터 대우와 포항제철이 프로팀으로 전환해 참가했고 현대와 럭키금성이 프로팀을 창단, 리그에 참가하며 내실을 다져나갔다./출처=대한축구협회

하지만 이 5년 동안 실업팀을 끌어와 리그를 운영하던 미흡함을 청산하고 리그에는 프로팀만 참가하게 됐으니 그 시간이 마냥 헛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별안간 시작해 지금 돌아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는, 하지만 한국축구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했을 당대 축구인들의 고민들. ‘시행착오’는 1980년대 한국축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 아닐까. 잘 가는가 싶더니 뒤로 흐르고 그러다가 다시 또 앞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사행천(蛇行川)처럼, 더디 보여도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며 꾸준히 발전해 간 1980년대의 한국축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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