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그때 공동체 의식이란 걸 처음 알았어요.”

지난 6월 25일, 대전리빙랩네트워크 출범식에 이어진 세미나에서, 황톳길로 유명한 대전 계족산 입구 ‘도심 속 농촌 장동마을’의 리빙랩 활동을 이끌었던 송주석 대표가 했던 발언이다. 다소 어눌한 듯 생생하게 이어지는 그의 발표에는 박수와 폭소가 번갈아 이어졌다.

대전은 일찍부터 협동조합과 마을 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발달했던 도시다. 현존하는 국내 협동조합의 초창기 역사 중 한 자락에 한밭생협의 33년 역사가 자리 잡고 있고, 마을어린이도서관 운동과 지역화폐 운동, 의료생협, 공동육아 운동 등이 일찍부터 정착한 도시다. 이런 토대 위에서 마을공동체 활동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일찍 퍼져나갔다.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도시, 근대화의 과정에서 잃어갔던 공동체성, 아파트의 증가와 골목 문화의 소멸,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이웃과 가족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성도 약화하고, 1인 가구 비율도 전국 최고 수준이 된 대전에, 어딘가로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을과 공동체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지 20~30년이 되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90년대 시민사회 운동의 확장 시기를 거친 후 가치와 실천 방법론이 점차로 분화하면서, “지역에서 마을로, 공동체로” 새로운 현장 공간을 찾아 나아가는 시민운동의 흐름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치·경제·사회적 정의 등 거대 담론을 외치며 문제를 제기하던 활동으로부터, 지역 내에서 공동체적 가치들을 자치적으로 실현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활동으로 나아가는 흐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흐름에 최근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리빙랩’이다. 한편으로는 이슈 파이팅과 정부·지자체 및 기득권 성토, 또 한편으로는 마을 속의 고립되고 확장성 약한 작은 실천, 그 사이의 벌어졌던 거리를 메꾸면서, ‘거주자로서의 주민’이 ‘주권자로서의 시민’으로 거듭나는 자율·자치의 경험과 실천의 공간, 그리고 그 기회가 리빙랩을 통해 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과 공동체 운동 기반이 일찍 확산한 대전에서는, 리빙랩 활동에서도 이들 생활 현장 조직의 활동성이 도드라지는 특성이 드러난다. 현장 기반의 이슈 도출과 공론화 프로세스가 다른 어떤 지역들보다 발달해 있는 편이다. 스스로 제기한 문제들이 마을 안에서 공론화되는 경험, 그 문제들을 자신의 참여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의 실현을 지원하는 자원과 협력체계들이 시민들의 자기효능감을 키우고, 공동의 문제해결 경험은 이들이 공동체적 요구에 더욱 민감해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주민참여 디자인을 통해 만든 장동의 마을 분리수거함.
주민참여 디자인을 통해 만든 장동의 마을 분리수거함.

처음 얘기했던 장동의 리빙랩 사례로 돌아가 보자. 계족산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장동은 쓰레기 분리수거가 적용되지 않는 농촌마을이었다. 작년 마을회의에서 깨끗한 마을을 만들어 보자고 합의한 주민들은 마을 분리수거함을 설치하는 일에 마음을 모았다. 마을 현장 조사와 공유워크숍을 거쳐 함께 쓰레기통을 디자인했고, 버스주차장 앞에 마을 분리수거함을 설치했다. 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위한 분리배출 안내 리플렛도 제작했다.

직접 만든 분리수거함은 마을 주민들의 문제해결 자신감을 높였고, 이 성과로 8명의 분리수거요원 마을일자리도 창출했다. 긍정적인 문제해결 사례가 형성되니, 인근 기관·단체들의 관심과 지원도 이어졌다. 한남대와 협력해서 마을벽화를 그렸고, 관광객과 방송사가 마을을 찾아왔으며, 한밭수목원과 대덕구청 등에서 마을 꽃동산 조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망가진 우체통을 바꾸고 가로등을 LED로 바꾸는 등 마을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이 남달라졌다.

주차장과 마을길 안전을 위한 삼성동의 주민참여 데이터 활동.
주차장과 마을길 안전을 위한 삼성동의 주민참여 데이터 활동.

삼성동 사례도 있다. 협소한 도로와 주차장 부족으로 몸살을 앓던 마을에서 2019년 주차장 문제해결을 위한 리빙랩 활동을 시작했다. 강의 기회에 참고사례로 독산4동의 활동을 소개했다.

“이렇게 통과 차량, 불법주차 차량, 역주행 차량 대수를 시간대별로 세어서 데이터를 만들었어요. 문제해결 방안을 찾는 데 데이터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활동 결과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연세 있는 마을 주민분들이 백지에 ‘바를 정(正)’자를 그려가며 기록한 차량 통행 데이터 사진, 그리고 주차공간과 차량 통행 여건을 파악해 보기 위해 도로 너비를 줄자로 재고 있는 주민 사진. 원하는 만큼의 주차면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주민참여 활동을 통해서 인근 시설의 주차공간 개방에 대한 동의를 얻을 수 있었고 도로 안전을 위한 시설개선 요소들도 도출할 수 있었다.

이런 사례에 겹쳐 과거 활동에서 만났던 어느 주민들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첫 번째 장면은 시민참여연구센터의 발족을 준비하며 지역사회 문제해결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던 2003년의 일이다. 산업공단에 인접한 주거지역 주민들이 느끼는 환경오염 문제를 면담·조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우리 목소리를 들으러 와 준 게 이번이 처음이다”라며 눈물을 보이셨던 연세 든 주민의 모습. 두 번째는 리빙랩이라는 이름으로 첫 활동을 했던 2015년의 일이다. 지역현장의 문제해결 욕구 조사를 위한 면담에서 한 농민분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문제해결은 둘째치고, 이렇게 직접 우리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와 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문제의 대상,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졌죠. 문제를 들으러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해 주기만을 바랐던 주민들이, 이제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리빙랩이 마을과 공동체를 바꾸고 있다. 한국의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바꾸고 있다.

김민수 시민참여연구센터 운영위원장/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김민수 시민참여연구센터 운영위원장/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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