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군 이래 최대인 8조8000억원이 투입되는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 사업(KF-X)이 결실을 보았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독자적 전투기 개발을 천명한 후 20여 년 만에 드디어 4.5세대 멀티롤 전투기를 목표로 한 KF-21 보라매가 베일을 벗고 웅장한 기체를 드러냈다.

출고식이 있기까지 KF-X 사업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새로운 전투기를 개발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성능이 검증된 5세대 스텔스 전투기를 한 대라도 더 구입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지적이 많았다. 또한 양산 단계에 들어갔을 때 수출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큰 우려였다.

한국형 전투기(KF-X) 시제기 출고식이 지난 9일 열렸다./출처=청와대
한국형 전투기(KF-X) 시제기 출고식이 지난 9일 열렸다./출처=청와대

규모의 경제를 이뤄야 하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
새로운 전투기는 개발과 양산에 천문학적 금액이 필요하다. 미국이나 러시아처럼 자국 수요를 충당하는 것으로 충분한 나라가 아니면 대부분 같은 성능의 전투기를 필요로 하는 다른 국가와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4개국이 개발과 생산에 공동으로 참여한 4.5세대 전투기 유로파이터 타이푼이다. 유로파이터 측은 개발 초기부터 판매처를 물색했다. 20여 개 국가가 사전 구매 의사를 밝혀서 전투기 제작은 순항하는 듯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4개 국가도 구매 수량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단 5개 국가가 수십여 기를 구매하는 데 그쳤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1000기 이상 생산해야 하는데 실제 생산량은 목표의 절반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우리도 KF-X 사업이 같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정 부담을 낮추기 위해 공동제작할 파트너와 미래의 고객을 미리 물색해야만 했다. 하지만 훈련기만 제작해 본 나라와 전투기 공동개발의 리스크를 함께 나눠질 나라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로파이터 타이푼의 경우 군용기 개발 경험이 풍부한 국가들이 넷이나 달라붙었는데도 기술적인 난제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선박 제조 강국이라 군함을 만들 때 기본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한편 항공기 제작 경험이 일천하니 첨단 항공기술의 집약체인 전투기를 만드는 것은 사실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손을 잡은 유일한 나라가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 ‘먹튀’는 지나친 염려
인도네시아는 전체 비용의 20%를 분담하고 제조기술도 일부 이전받는 조건으로 참여를 결정했다. 그런데 시제기 출고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던 시점에 인도네시아가 머뭇거리는 조짐이 나타났다. 계약대로라면 지금까지 중도금 7200억 원을 지급해야 하지만  2200억 원만 내고 나머지 5000억 원은 계속 지급을 미뤄왔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작년 3월에는 파견나와 있던 기술진 100여 명을 본국으로 전격 소환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인도네시아가 기술이전만 받고 ‘먹튀’할 것이라는 뉘앙스의 기사가 계속 나왔다. 인도네시아 같은 후진국하고 처음부터 손을 잡은 것이 문제였다며 여론도 악화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도네시아 ‘먹튀’는 기우다. 인도네시아가 머뭇거린 데에는 국내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KF-21 보라매 출고식에는 인도네시아 측에서 프라보워 수비안또 국방부 장관이 직접 참석했고,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프라보워 국방부 장관은 일개 장관이 아니다. 장기집권을 한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이자 합참의장까지 역임한 군 실세 중의 실세였다. 1998년 IMF 위기 때 전국적인 수하르토 하야 요구 시위가 일어났는데 프라보워는 강경 진압을 지시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프라보워 또한 강제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차기 대통령 물망에 오르는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국방장관은 방한해 정의용 외교부장관과 면담을 가졌다./출처=외교부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국방장관은 방한해 정의용 외교부장관과 면담을 가졌다./출처=외교부

야인으로 돌아가 권토중래하던 프라보워는 수하르토 잔존 세력이 중심이 된 정당에 들어가 권력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고, 2014년 대선에서 당시 수도 자카르타의 시장이었던 조코 위도도 후보와 맞붙었다. 개혁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던 대선이라 큰 표 차이로 패했는데 정치적으로 다시 일어섰고,  재선에 도전하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 2019년 대선에서 리턴 매치를 벌였다. 이때는 표 차이가 크지 않았다. 프라보워는 두 번째 대선 패배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거부정을 이유로 선관위가 발표한 대선 결과 수용을 거부했다. 프라보워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인도네시아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결국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가 대선 결과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한 후에야 프라보워는 겨우 승복했다.

조코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했을 무렵부터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다. 강경 대응을 하지 못하는 조코위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를 정치적 호재로 여긴 프라보워는 군 출신 안보전문가 임을 내세워 자신의 적수였던 조코위 대통령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한편 조코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최대 목표로 행정 수도 이전을 천명한 터라 거기에 집중하고자 했다. 수도 이전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 남중국해 분쟁으로 인해 여론이 계속 악화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정치적 타협에 의한 국방부 장관직을 적극 활용하는 프라보워
결국 조코위 대통령은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 정적인 프라보워에게 국방 문제를 일임하기로 한 것이다. 양자는 비밀리에 만나서 담판을 지었고 조코위 대통령은 프라보워를 국방부 장관에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대선 3수를 공언했고 다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프라보워 입장에서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국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적 밑에서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애국자라는 이미지 메이킹을 하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국방부 장관이 된 프라보워는 그간 추진되어온 모든 국방력 강화 사업을 재검토하기에 이른다. 국방 예산이 한정되어있기에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마땅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에서도 한국과 전투기를 공동으로 개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꾸준히 있었다. KF-X가 양상 단계에 돌입할 시점에는 미국과 러시아의 5세대 전투기 또한 훨씬 업그레이드되어있을 텐데 왜 굳이 검증도 안 된 한국의 전투기를 사야하냐는 비판이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무기 분야에 훨씬 선진국인 한국과 합작을 하는 것에 인도네시아가 훨씬 적극적일 것 같지만 인도네시아 군의 계산은 무척 치밀하다.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KF-X 사업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끝까지 가기로 최종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이미 납부한 돈은 중간에 계약을 파기하면 반환이 안 된다는 점과 전투기 양산을 위해 1억 달러 이상을 들여 짓기 시작한 전투기 생산 설비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른 시일 안에 한국의 힘을 빌려 항공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책 결정권자의 결단이 있었음은 불문가지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의 후진국이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도 지역의 다른 나라보다 앞서 나가려고 전력투구하는 동남아의 맹주라고 우리의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KF-X 사업에 관한 한 어느 한쪽이 상대를 더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서로 똑같이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인식이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