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토브리그 사진./사진제공=SBS

야구 비수기 시즌인 겨울에 프로야구 팬들을 TV 앞으로 끌어오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SBS 금토 드라마 <스토브리그>이다. 90년대 농구붐과 맞물린 <마지막 승부>를 제외하고는 딱히 기억나는 스포츠 드라마가 없는 상황에서 <스토브리그>의 인기는 놀랍다. 작년 12월 13일 첫 방송만 하더라도 5.5%의 무난한 시청률이었는데 입소문을 타고 파죽지세로 시청률이 올라 1월 17일 10회에서는 17%를 찍었다. 설 연휴 결방 소식에 팬들이 항의할 정도이다.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 꼴찌팀 드림즈에 새로 부임한 단장이 팀을 개혁하며 새 시즌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토브리그(Stove League)는 프로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비시즌 기간으로서 겨울철 스토브(난로)를 둘러싸고 팬들이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선수계약, 다음 시즌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스포츠를 드라마화, 영화화하는 것은 얼핏 보면 성공이 보장된 안전한 전략같다. 하지만 ‘각본없는 스포츠’라는 말처럼 실제 스포츠에서 일어나는 일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실시간 감동을 선사하기에 실제 스포츠를 극화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스토브리그>는 여기서 역발상 전략을 시도했다. 드라마 <동백꽃필무렵>의 오정세가 ‘역차별’이라고 얘기한 그 역발상 말이다. 

어차피 실제 스포츠만큼 감동을 주기 어려운 극적인 스포츠 경기를 드라마의 중심소재로 삼기보다는 그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가져왔다. 몇 년 전부터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 실시간 댓글을 통해 선수와 팀에 대한 뒷이야기를 나누는 문화가 생겼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던 이들이라면 월드컵 때를 생각해보라. 모여서 서로 전술을 분석하고 각 선수들에 대해 아이돌 팬으로서 애정을 드러내며 치맥으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았나. 

드라마 <스토브리그>와 닮은 꼴 영화 <머니볼>

영화 머니볼 포스터./사진제공=컬럼비아 픽쳐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다. 가장 크게는 2011년 브래드피트 주연으로 국내에도 개봉한 <머니볼>이다. 흥행과 비평에 모두 성공하여 제작비 5천만 달러에 전세계 총매출 1억706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제 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5위 안에 꼽힌다. 나머지 영화들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하지만 뭐. 

이 영화는 2002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성공 신화에 대해 경영학적 분석을 한 마이클 루이스 저의 동명의 책 <머니볼>(비즈니스맵, 2011)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책은 2003년 출간 이후 8년 연속 아마존닷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야구계뿐만 아니라 미국 최고 경영자들의 필독서로 잡혔다. 

책과 영화의 줄거리는 현재 <스토브리그>와 유사하다. 패배에 젖어 든 조직을 뛰어난 컨설팅 역할을 수행하는 단장과 전략분석원 등이 힘을 모아 하나씩 문제들을 해결해 끝내 개혁에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스토브리그>에서 한국 드라마 특유의 코드인 연애는 제거했지만 구단주, 임동규와 같은 악인을 설정한 것과 달리 책과 영화는 특별한 악인보다는 구태에 젖은 조직의 개혁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악인보다는 관성에 빠진 구성원들이 문제의 중심이다. 

자, 이제 문화 얘기는 충분히 한 것 같고 문화적 소양이 얕은 나보다는 이 책, 영화, 드라마에 대해 ‘스토브’에 둘러싸서 더 얘기할 야구매니아들이 많을테니 그만하고 사회적경제 이야기로 가야겠다. 어차피 이 지면을 읽는 사람들은 사회적경제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또 여기에서까지 사회적경제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짧게 할 것이다. 뜨끔했나. 

그 전에 한 가지만 덧붙이면 본인은 실제로는 광주에서 초중고를 나와 해태팀을 강제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지만,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야구 경기만 했다 하면 무조건 소주를 마시면서 이기면 이긴대로 환호성을 지르고 지면 진대로 또 한과 울분을 토해내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1997년 김영삼 정권이 시원하게 한국 경제를 말아드시고 우여곡절 끝에 백승수 단장의 전략만큼이나 특이한 민주당과 자민련의 연정이라는 변칙을 통해 간신히 최초 정권 교체가 되기까지 해태는 야구 그 이상이였다. 그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술과 결합된 야구의 추억은 싫다. 내 할아버지가 메이저리거 저리가라 할 정도의 몸관리를 하며 90세 가까이 될 때까지 꾸준히 가정 폭력을 행사한 프로 알콜러였기 때문이다. 그는 장기 현역 알콜러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칸트처럼 매일 아침 2시간 신문을 정독하고 오후 2시면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서 정확히 4시 반이면 경찰에 의해 끌려와 매일 매일 똑같은 레퍼토리로 욕을 하고 주기적으로 엄마와 나를 패대었다. 

<머니볼>을 사회적경제와 억지로 엮어보자

이제 지면이 끝나간다. 왜 <머니볼>을 문화로 읽는 사회적경제의 첫 소재로 삼았냐면 2가지 장면 때문이었다. 먼저 영화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평가된 선수들이 나열된다. 투구 폼이 이상해서, 연애생활이 문란하다는 이유로 등 야구실력과 무관한 이유로 실제 능력이 몸값에 반영되지 않은 예들이 나온다. 굳이 경력단절여성, 장애인, 청년에 대한 이해찬의 막말 발언을 다시 자세히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최근의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자본주의는 똑 부러지고 사회적경제는 마냥 온건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나는 아담 스미스든 칼 폴라니든 상관없이 사람들의 가치가 제대로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영화를 한 번만 보는 취향이 있는 내가 유독 <머니볼>만 보고 또 보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혁신을 통해 체질이 개선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승승장구 하지만 결국 우승을 하지 못한다. 영화 내내 패배자 정서를 짙게  풍기는 브래드 피트는 또 좌절한다. 신화와 같이 아름다운 그가 패배자라니, 맙소사. 거기에다 등까지 패배자 연기를 하고 있다. 보고 있노라면 영화 내내 씹고 있는 아몬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생물학적 남자로서 이런 발언 불쾌하게 해서, 미안하다. 그럼 마음이 들더라도 이성애자 남성들의 불편한 심기를 위해 주의하겠다.

하여튼 마지막 패배자 브래드 피트에 대해 영화는 10분 남짓한 시간에 3가지 위안을 제시하며 묘한 여운을 남기고 마무리된다. 먼저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가 팀은 결국 우승을 못했을지라도 야구의 판도를 바꿔냈기에 승리했다는 이야기다. 사회적경제도 판도를 바꿔냈다. 사회적경제기업 하나 하나는 성공을 못했더라도 우리는 이미 기존 정부와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경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두 번째 브래드피트와 짝을 맞춘 전략분석가는 야구 덕후의 분위기를 풍기며 씁쓸해하는 브래드피트에게 한 영상을 보여준다. 뚱뚱한 걸음이 느린 타자가 홈런을 쳤음에도 그걸 모르고 전력 질주하다 넘어진 장면. 브래드피트 말대로 “이래서, 야구를 사랑할 수 없어”가 자연스레 나온다. 2013년 7월 성균관대학교 교직원으로 일을 하던 중 조직 내의 여러 불합리함과 모순에 저항하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나쁜 일은 하고 싶지 않아 협동조합 영역으로 이직왔다. 4,400만원 연봉과 사학연금은 2,800만원 연봉으로, 그 마저도 1년이 채 안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가게 되었다. 대단히 의미있는 일을 하려던게 아니라 오로지 8년 동안 생존하기 위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가다가 작년 5월 공황장애로 넘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난 울고 또 울었다. 열심히 했는데 남은 게 뭔가란 한탄과 자책이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많은 홈런을 친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뤄냈고 9권의 책과 30여권에 이르는 정책보고서와 헤아릴 수 없는 기사와 글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딸의 노래인 <The Show>의 가사가 예술이다. 이건 직접 들어보시라. 원곡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인 Lenka의 노래라고 한다. 하여튼 연줄도 내공도 부족한 내가 사회적경제에서 맨땅에 헤딩하며 아등바등하다 고꾸라져 다시 걸음마하기도 무서워하는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말했다. “사회적경제에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길을 걷는다. 악플 하나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그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베꼈다. 첫 칼럼부터 악플을 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다. 그럼 모두 펭하하시고 <The Show>의 가사를 개사하며 첫 글 마친다.

난 잠시 고민에 빠졌어요.
사회적경제는 미로같고 정부 정책은 수수께끼 같아요.
난 중간지원조직으로 가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애써 해봤지만 연줄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난 왜 이럴까요.

이제 모두 속도를 줄이고 멈춰요.
안 그러면 나처럼 번아웃이 되버릴거야
이 속도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드니까요.
사회적경제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돼버릴 수 있어요.

난 사회적경제의 바보가 되었어요.
휴식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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