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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운 좋게 <해이 북 페스티벌(Hay Book Festival)>에 참여하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몇 년 전부터 해이 북 페스티벌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귀가 솔깃해 찾아가 볼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도 아닌 영국에서 열리는 행사에 맞춰 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만 올해는 정말 여러 가지로 운이 닿았는지 포기하려는 순간에 그곳에 가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축제에 참여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특히 숙소를 찾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축제 기간이 짧지 않았음에도 행사가 열리는 해이 온 와이(Hay-on-wye)는 물론이고, 근처 지역에도 남아있는 숙소가 거의 없었다. 해이 북 페스티벌 공식 웹사이트에서 안내하는 숙소뿐 아니라 다른 웹사이트를 통해 수십 군데가 넘는 곳에 연락을 했지만 3일간 묵을 방 하나 구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거의 애걸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메일을 쓰면 이틀쯤 지난 후에 ‘우리 숙소는 이미 자리가 없다’는 거절의 답신이 도착했다. 그 동안 서두르지 못한 나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오기가 생기기도 해서 끊임없이 메일을 보내던 중 한 숙소에서 해이 온 와이 마을에서 운영하는 지원센터에 알아보라는 조언을 주었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보낸 메일에서 근처 지역 전체에 방 하나가 갑자기 났다는 답이 왔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연락해 겨우 방을 잡고 나서야 이 축제가 도대체 어떤 축제이기에 이 난리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전 세계 출판인들의 축제라고 불리는 <독일 푸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이 출판 산업을 움직이는 대규모 행사인 것에 반해, <해이 북 페스티벌>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면서도 시골마을에서 마을사람들이 주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데도 전 세계의 책벌레(책 수집상이나 애호가와는 다른)들이 모이는 책 축제인 것이다.


사실 축제가 열리는 해이 온 와이 마을은 런던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을 달려야 하는 웨일스의 시골마을이다. 그나마 급행 기차나 버스도 없고, 우리로 치면 읍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헤리포드(Hereford)역’에서 행사 특별버스를 타야 한다. 이 버스도 하루에 서너 번밖에는 운행하지 않고, 한 시간은 족히 달려야 겨우 해이 온 와이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이렇게 작은 마을인 해이 온 와이는, 그러나 이제 전 세계에 ‘책 마을’의 모범으로 불리며, 진정한 책 축제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와 지역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가 됐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힘이 무엇일까?


천신만고 끝에 잡은 숙소는 그나마도 역에서 자동차로 삼십 분 이상 떨어진 매우 후미진 시골마을의 오래된 농가(Barn)을 개조한 곳이었다. 친절한 아저씨가 자신의 승용차로 해이 온 와이 읍내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들판과 멀리 보이는 블랙 마운틴을 배경으로 한참 달리자, 화려하진 않지만 주인의 정성이 한껏 느껴지는 작은 농가가 나타났다. 이 농가의 주인인 ‘애니’와 ‘롭’뿐 아니라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이 축제기간에만 민박집을 운영한다고 했다. 축제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 때문에 자신이 쓰던 방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 집의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옆방에 머물던 런던에서 온 가족은 물론이고, 10년 째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페스티벌에 참석한다는 은발의 덴마크 할머니 ‘한나’와 주인인 ‘애니’와 ‘롭’은 축제 브로셔를 벽에 붙여 놓고 매일 2~3개씩 스케줄을 짜가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이들 모두 한국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며 우리에게 어떤 작가를 좋아하고, 어떤 세션을 들으러 갈 것인지 궁금해 하기도 했다. (요즘 세상에 한국인을 처음 만나는 곳이 있다니!)

1987년 시작된 <해이 북 페스티벌>에는 매년 영국의 유명 작가들이 방문한다. 그리고 해외의 유명 작가들이나 영화제작자들, 또 코미디언들과 음악가들, 심지어 정치인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이들은 책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세션을 개최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책으로 하나가 되는 분위기에 흠뻑 취해 돌아간다.

장르도 다양해서 문학, 역사, 철학, 경제, 환경, 정치와 언론뿐만 아니라 종교, 청소년, 아동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장르의 도서와 작가가 참여한다.?평소 거액을 제안해도 모시기 힘든 세계적 작가들도 이 축제만큼은 흔쾌히 참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다른 어떤 책 축제보다도 독자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에 적극적이다.?특히 이번 축제에는 한국의 신경숙 작가와 장하준 교수가 초청되어, 우리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주었다. 신경숙 작가는 ‘엄마를 부탁해’로,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로 소개됐다.

축제가 진행되는 열흘간 사람들은 호텔, B&B, 민박, 심지어 텐트촌에서 지내며 매일 아침 해이 온 와이에 마련된 축제 부스로 향한다. 축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80대의 노인부터 서너 살 꼬마들까지 말 그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연령층이며, 옷차림은 제각각이지만 누구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사람들은 행사장에 준비된 작가들과의 시간, 책 전시부스 및 옥스팜 헌책방과 각종 이벤트 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올해는 특히 행사장을 마련할 때 다양한 친환경적인 시도를 통해 단순히 즐기는 축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해이에서 머무는 2박 3일간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책을 좋아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책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놀고 느끼고 즐기는 모든 활동들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러나 즐거웠던 만큼 ‘우리에게도 책이라는 테마로 모여서 문화를 나누고 만들어 갈 수 있는 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우리도 우리의 개성을 살린 우리만의 축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해이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것이 분명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간 각 지자체마다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비슷비슷한 축제에서 벗어나, 시민의 힘으로 우리만의 문화와 개성을 듬뿍 담아내는 좋은 축제가 탄생하기를 열망해본다.

글쓴이: 황현이 아름다운가게 국제협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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