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에 사는 기자, 번역가, 인권 활동가, 직장인, 생활인이 모인 독서 모임을 나는 ‘시스터 후드’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옥천 언니들 독서 모임’이라고 부른다. 2019년 3월 즈음 “어려운 책, 책장에 꽂아 놓고 혼자는 안 읽는 책,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책을 함께 읽어보자”는 제안으로 시작한 독서모임에 동네 ‘언니들’이 모였다. 그동안 여러 독서 모임을 해봤지만 격주에 한 번, 9개월 동안 총 7권의 책을 읽을 만큼 활발한 모임은 내게 처음이었다. 매번 다른 음식과 술,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각자 살아온 삶과 고민이 조각조각 튀어나와 모이는 신기한 광경을 지켜봤다. 누군가 ‘독서 모임의 어떤 점이 좋느냐’고 묻는다면 오늘을 떠올리리라 생각하면서.

실은 모두가 동네에 흥미로운 독서 모임이 생기기를 갈구했던 것 같다. 서울로 독서 모임을 다니며 늘 9시 50분 마지막 기차 시간에 쫓겼던 사람은 ‘동네 독서 모임은 시간이 늦어도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옥천에서 직장과 집을 오가는 것 외에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고자 했던 사람은 ‘독서 모임에서 오가는 대화가 좋다’고 했다. 우리는 전국 독서동아리가 참여하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 독서동아리 지원사업을 받아 책을 샀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혜진, 오월의 봄)과 같은 신간을 읽기도 했고, 『책 읽는 뇌』(매리언 울프, 살림)과 같은 화제의 책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라고 하면 SF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허블)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책 한 권에 담긴 일곱 개 단편소설을 두고 나눈 이야기가 내 ‘열등감을 품으며 선뜻 드러내지 못하는 어떤 사적인 요소’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은 뒤 누군가 동양인, 여성, 비혼모로서 첫 번째 우주비행사가 된 인물을 보며 닮고 싶은 어떤 분야의 ‘언니’를 떠올릴 때, 나는 단편 소설 주인공 대부분이 고학력자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과학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나는 비대학 지역 청년이라는 열등감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져도 평가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 독서모임에서 부지런히 나를 내뱉었다. 사회 초년생, 어린 나이, 평균보다 낮은 학력, 지방러, 게으름, 부끄러움, 어려움... 여러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도 해결되는 건 없었지만, 적어도 조금씩 나라는 정체성을 인식하고 구축할 수 있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현장에 눈을 돌려야 할지 길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옥천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고, 몇 가지 모임과 송년회를 치루며 2019년을 마무리했다. 여태껏 나를 가장 약자로 인식한 해였고, 역설적이게도 내 위치를 인식한 덕에 슬픈 열등감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더 큰 열등감에 빠져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열등하게 바라보는 요소는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 18일 시스터 후드와 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이 주최한 『장애학의 도전』(김도현, 오월의봄) 북 콘서트에 다녀오고 나서야 알았다. ‘나를 열등하게 한 것은 내 열등함이 아니고 열등함을 열등하게 만든 사회였구나’ 무엇이 장애를, 여성을, 지역을, 학력을, 계급을 열등하게 만드는지 곰곰이 따져봐야 했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인 저자 김도현은 ‘장애학’을 ‘관점의 이동’으로 보여준다. 저상버스 보편화로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쉽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면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즉,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손상은 특정한 관계에서만 손상이 된다.” ‘장애인’이라는 개념 역시 산업 자본주의 때 만들어져 겨우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모든 차별의 핵심은 “다른 것을 소구하고 한 가지 특성만 남겨놓는 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관점을 이동한다는 것은 “사물의 다른 면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라고. “중심에 섰을 때는 시야가 협소하지만 변방에서 보는 풍경은 풍부하다”고. 북 콘서트가 끝나고, 자리를 옮겨 공간을 바라봤다. 여태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람들의 해사한 표정이 보였다.

옥천군은 2019년 10월 30일 처음으로 저상버스 1대를 도입했다.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설립된 지 10년 만이고, 그간 장애인을 비롯한 교통 약자의 이동권을 요구해온 결과다. 11월 22일자 옥천신문 <‘저상버스 도입’ 교통약자 이동 편의 증진 신호탄 될까>에 따르면 옥천군 교통약자는 총 2만2천289명. 옥천군 인구 5만1천465명에 비하면 약 43%가 교통 약자에 해당한다. ‘교통 약자’라는 말에 문득 내 노후를 떠올린다. 내 부모를 떠올린다. 나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이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얻을 가능성에 관해 생각해본다. 누구나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버스가 많아지는 일, 누구나 높은 턱 앞에 멈춰 서지 않고 오갈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지는 일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 KTX가 서지 않는 옥천역에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서울발 9시 50분 막차가 폐지된 것 역시 지역민의 이동권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용자 수가 적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이들은 어쩌면 옥천을 떠날 것이다. 삶의 조각을 모으고 맞춰온 동네 독서모임을 다시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무엇이 약자를 약자로 만드는가. 후진 건 지역 그 자체인가, 지역을 후지게 만드는 사회 구조인가. “소수자의 시선은 그 자체로 진보성이 있다”는 김도현의 말을 곱씹는다. 소수자라는 이유 하나로 진보성을 갖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견고한 구조와 편협한 말은 우리를 자주 속이기 때문이다. 절망하고 외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관점을 바꾸고, 시야를 넓혀주는 건 결국 모이고 말하고 읽고 쓰는 일이다. 어리둥절하게 들었던 독서모임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제야 조금 손에 잡힌다. 2019년 시스터 후드에서 나눈 놀랍고 흥미로운 고민이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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