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구속이나 속박, 지배 등이 없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한다. 이 추상적인 자유라는 개념은 국가의 헌법과 법률에 의해 보장되는 '법률적 자유', 선거 및 피선거의 권리를 지니고 투표에 참여하고 자신을 대표 할 사람을 선출하여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가지는 '정치적 자유', 부자는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상태가 아닌 '경제적 자유'라는 구체적 개념의 달성을 통해 완성 될 수 있다.

돌아보면 우리는 법률적, 정치적으로는 매우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 최소한 술집에서 막걸리 먹으며 나라님 욕해도 잡혀가는 사회는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경제, 사회적으로도 자유로운 상태의 사회인가에 관한 것이다. 주식회사라는 형태의 기업조직이 출현하면서 인류는 거대회사에 의한 독점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90년 미국에서는 반독점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반독점법이 시행된 이후의 경제적 자유의 역사는 그 개념에 대한 해석과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사회적경제를 자유로운 사회로 가는 수많은 길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경제적 자유는 개인 선택의 폭을 넓히고 효율적 자원배분과 투자확대를 통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늘린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포퓰리즘에 빠져 여러 가지 명분과 이유로 기업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식의 경제적 자유에 대한 해석은 늘 뉴스의 메인을 장식한다. 이런 식의 해석이 옳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2018년 삼성전자는 12조6,000억원을 광고비로 집행했다. 전 세계 기업 중 1등이다. 지난 수백년 간 자본수익률(r)은 경제성장률(g)을 능가(r>g)해 왔다는 피케티류의 주장을 진지하게 다룰 연구자와 언론이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피케티류의 주장은 자신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 줄 것 같지도 않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학교나 회사에 가지 않을 자유는 보장된다. 그러나 나는 회사에 구성원이므로 구성원으로서 나의 권리를 주장 할 자유는 점점 작아지거나 아예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빙하가 내 눈 앞에서 녹아 내리 듯 수많은 노동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다. 인류는 그리스, 로마 시대처럼 일부만 자유로운 사회로 역진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법률적,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인 형식적 자유를 넘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실질적 자유의 사회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 고되 보인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같이 작은 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래도 이 땅의 수많은 을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하고 싶다. 중용(中庸) 23장에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사회적경제를 자유로운 사회로 가는 수많은 길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주식회사가 속한 더 큰 공동체인 국가가 민주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이제 부정하기 어려운 공리가 되었다. 국가가 민주적으로 통제 될 수 있다면 국가보다 작은 공동체인 주식회사 역시 그럴 수 있다. 나는 100일 앞으로 다가 온 국회의원 총선거 날 나를 대변할 이를 찾아 투표장으로 갈 것이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대한 질문을 포지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조금씩 변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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