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엔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생각하게 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 그러그러한 내일이 오늘이 되지만 이즈음 돌아보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대나무에도 꽃이 있다. 몇십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숲 전체가 한 번에 고사하기 때문에 잘 볼 수 없단다, 항상 푸르고 곧음만 있지 않는다는 것 또한 대나무가 알려준다.
최근 자문을 요청받아 충남의 한 농촌지역에 다녀왔다. 청년들의 지역살이를 지원한다며 수십억을 들여 버려진 창고를 바꾸는 사업이다. 게스트하우스, 카페, 공유사무실, 공유작업장 등등 도시재생 냄새가 나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 후 청년들이 이 지역의 농산물 브랜드와 패키지를 만들면 지역에 도움이 되고 글로벌한 기업도 나올 수 있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덧붙여진다. 예전에 살기 힘들다며 농촌을 떠났던 청년들이 돌아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농촌이 살기 좋아진 걸까.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겨서인가. 공간을 만들면 청년들이 갑자기 일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청년들이 원하는 것이 글로벌한 무언가가 되는 것일까.
지역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방소멸’이라고 하지만 그건 인구가 줄어 지방정부가 합병되는 것을 걱정하는 이야기이다. 인구가 줄어도, 지방정부가 없어져도 어디에선가 누군가 살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이다. 체르노빌과 같은 재난이 생기지 않는 한 지역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지방이 소멸된다는 생각은 지역을 도시와 대비하여 개발의 대상이나 자원으로 보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도시를 지탱하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공간, 도시로 유입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언제든지 공장과 집을 지을 수 있는 토지 등등. 국가발전을 위한 공간과 자원이 있는 곳이 지역이었고, 지역 또한 이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을 지역발전이라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지역이 가지고 있는 장소성과 고유성은 무시되었다. 학자들은 이를 로컬리티(locality), “삶터로써 공간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통해 만들어가는 다양한 관계성의 총체”라 부른다. 지역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 로컬리티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청년들이 농촌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도 이 로컬리티 때문일 것이다. 대기업에 취직을 한다해서, 출세 지향의 삶을 추구한다해서 행복에 1%도 다가갈 수 없는 처참한 현실이 로컬리티를 소환한 것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달동네에서, 후미진 골목에서 지역주민을 상대로, 지역주민과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는 청년들도 같은 심정이리라.
로컬리티를 정의한 마지막 단어는 ‘관계’이다. 청년시절에 배운 퍼머컬처(Permaculture)의 주요한 키워드 또한 이 단어였다. ‘무엇을 만들 때 다른 것과의 관계를 잘 생각하면 생태적으로 변하고 경제적이기까지 하다’가 퍼머컬처의 핵심이다. 그 후 몇 년뒤에 이 단어를 다시 접했다. 경제가 사회를 매몰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칼폴라니는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며 형식적인 경제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실체적인 경제가 인류의 삶을 지탱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사회적경제가 되었다. 그렇게 ‘관계’라는 단어는 내 생각을, 내 행동을, 내 삶을 재단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핵심으로 가지고 있는 로컬리티와 사회적경제가 만나고 있다. 이러한 일을 추구하는 친구들을 우리는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er)’라 부른다. 반갑고 고마운 존재들이다. 다만 이 친구들이 지역과 사회적경제를 연결하는 핵심이 ’관계‘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창의성 또한 관계의 다양성에서부터 발현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뿌리로 번식하는 대나무는 땅 아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대나무는 우리에게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아직 정확한 이유를 모르지만 대나무에 꽃이 피면 대숲의 늙은 대나무와 어린 대나무 모두 함께 죽는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오늘과 다르지 않는 내일이 오겠지만 달력을 바꾸는 대나무의 마디와 같은 요즘, 대숲의 경고도 함께 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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