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에도 한국은 불공정 사회’

2011년 12월, 기획재정부는 국가미래전략수립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2020년 한국사회의 질적 수준 제고를 위한 미래연구’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국민대 최항섭교수 외 18명의 연구원이 수행한 이 연구의 목적은 현재의(2011년) 한국사회의 질적 수준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그 질적 수준이 미래에는 어떻게 변화할 지를 전망하여, 이를 토대로 정부와 시민이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할지를 제시하고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의 질적수준의 지표를 포용성,공정성,안전성,창의성의 4개 요소로 정하고, 각 항목에 대한 평가와 이 요소가 10년 후에 어느정도 개선될 것인가에 대해 교수 연구자등 전문가 42명을 대상으로 심층인터뷰한 결과를 담았습니다.  

보고서는 2011년의 한국사회는 공정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10년 뒤인 2020년에도 여전히 ‘불공정’한 사회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언론을 포함한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지에 대해 사회의 좌절감이 뿌리가 깊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공정한 사회로 이행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답을 내기조차 힘든 사회가 되었고 10년 후도 그렇다고 합니다. 보고서가 발표된 다음날 방송과 신문들은 <10년 후에도 한국은 ‘불공정’사회>를 헤드라인 뉴스와 머릿기사로 보도하였습니다.

‘한국인은 공정함이나 정의에 예민해서 그렇다’

이제 2020년이 되었습니다. 10년 전의 보고서대로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불공정한 사회인지, 공정성이 나아졌는지의 판단은 어렵지 않습니다. 2019년 10월, 일본을 방문한 이낙연총리(당시)는 ‘한국의 대규모 군중집회는 무엇때문인가’라는 일본 학생의 질문에 ‘한국사람은 공정함이나 정의에 예민해서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공정함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는 불공정함이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해서입니다. 대규모 대중이 모여 한 목소리로 ’공정함‘을 요구하는 집회가 하루가 멀다하고 열리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 사회는 공정성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사회가 공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가 공정함을 원하고 아무도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우리사회는 공정해져야 하지 않나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공정한 사회를 원치 않는 우리도 모르는 ‘우리’가 있는건가요?  2040년에도 불공정이 지금과 같거나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입니까?

‘벼슬자리 여섯 해 보다 칙사접대 한번이 소원’ 

불공정한 사회의 시간을 과거로 늘려봅니다. 조선의 관료제도는 지배층의 특권을 보장하는 제도로서 운영된 측면이 있어, 관리의 부정부패는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연구되었습니다. 관행이자 특권으로 용납될 지경으로 만연된 탐학과 토색질이 관료제도 자체로부터 비롯된다는 문제점을 알고있었던 이 시기의 실학자는 벼슬아치의 공직에 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은 글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벼슬자리 여섯 해 보다 칙사접대 한번이 오직 소원이다(不願居官六載,但願一待勅使)”  대국의 칙사를 접대하는 국가대사가 토색질 명분으로는 순도가 매우 높아, 시답잖은 벼슬자리 여섯 해 동안 긁어 모을 수 있는 것보다 몇 곱의 고혈을 짜낼수 있었기에 칙사접대 한번 해보는 것이 ‘오직 바라는’ 소원이 되었습니다. 

뇌물로 벼슬을 산 탐관오리가 힘 없는 자들의 등골을 속히 빼먹고자 하는 간절하고 솔직한 욕망을 기탄없이 드러낸 이 말은 인간이 지닌 탐욕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지금으로 치면 ‘신도시 열 개보다 사대강 한방’인 셈입니다. 국가기관을 동원해 사익(다스 투자금회수)을 챙기고,공직 임명을 바라는 자(전우리금융지주회장)의 금품을 수수하고,기관(국정원)의 예산을 정기적으로 상납받은 국가최고지도자(대통령)의 독직이 낯설지 않은 것은 과거로부터 무한 반복되어 온, 유전자에 새겨진 부정이어서입니다. 지배계급의 탐욕과 이기심이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 사회를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불평등이 이 시대의 최대 과제’

조선사회와 지금의 삶의 질을 같이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구조적 불평등의 나락에 떨어진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자조하는 현재의 한국사회를 ‘부패한 조선의 개혁’을 염원했던 반계,성호,다산과 같은 당대 실학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요순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물질의 풍요만으로 삶의 질이 나아지거나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 대다수에게 한국은 조선사회와 동일하게 공정성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람이 살기 힘든’ 사회입니다. 우리 아이들 대다수는 ‘돈을 많이 갖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진자로부터 갑질을 당하지 않고 살려면 내가 (많이)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매일매일 각인시키고 있어서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전 시대가 얼마나 부정했고 그 부정을 왜 막지 못했는가를, 부정의 근원이 최고권력에서 비롯되어 지배계급 전체에 스며든 것을, 지도층의 탐욕과 이기심이 지금 우리 사회 불공정의 뿌리임을, 결국 우리 사회가 부정과 부패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여전히 살기 어려운 사회가 이어지리라는 것을. 

우리사회의 불공정성이 우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시대서부터 이어져 왔다는 인식은 우리 사회의 불공정성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식인을 포함한 사회지배계층의 탐욕과 이기심이 세대를 이어가며 사회전체의 도덕수준을 바닥으로 떨어트려 왔습니다. 공정과 청렴은 그 시대의 지배계급이 입으로만 외어대는 구호일 뿐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떄, 우리사회는 불공정의 늪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합니다. ‘불평등이 이 시대의 최대 과제’라고 역설한 지도자(정치인)를 찿는 것보다 이 말을 하지 않은 정치인을 찿기가 더 어렵지만,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루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불공정한 사회의 부패 사슬은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t)이 강해 좀처럼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사슬을 푸는 열쇠가 부패의 뿌리인 지배계층에 쥐어져 있어 위로부터의 단절(개혁)도 불가능합니다.  불공정의 사슬이 늘어날수록 경로의존의 덫도 많아져 점점 지속가능하지 않은 사회가 됩니다. 식민지가 되었고, 분단국이 된 하나의 이유입니다. 지금의 불평등과 그 격차가 더 이상 커지면 한국사회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불행한 역사의 순환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위로부터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면 밑에서부터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개인의 도덕심에 의존하려는 것은 무망한 생각이지만, 그렇더라도  약간의 희망이라도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구명줄이 우리 하나하나의 자각입니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얽매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서로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나와 (사회성으로)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세월호 유족과 같이 헤어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누구나 연민을 느낍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조금 더 선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다른 이들과는 다른 무게의 죄책감도 느끼게 됩니다. 자기가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고통과 절망에 공감하고 슬퍼합니다. 그렇지만 그 이웃의 고통과 절망의 원인(가해)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여기고, 심지어 이들의 불운이 자기에게 손해(사회적 비용)로 돌아온다는 이기적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이제 그만 좀 우려먹으시라’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세월호 유족이 우리이며, 세월호 선장도 우리라는 일말의 자각이 있으면, 우리 모두는 자기자신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행동에 나설 것입니다. 이로서 ‘사회의 질’이 높아집니다. 공정하고,투명하며,포용적인 사회로 옮겨 갑니다.  개인이 조금 더 행복한 사회가 됩니다. 개인의 삶의 질은 ‘사회의 질’과 상호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다시 조금 더 공정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 모두는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이 이루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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