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모식 사진에서 왼쪽에 캡을 쓴 간호 학생이 이그레이스, 오른쪽에 캡을 쓴 학생이 김마르다이다. /사진출처=국립여성사전시관 기획전 '여성, 세상으로 나가다' 중에서(2019.9.30~2020.8.14)

 

“1908년 2명의 간호사 이그레이스(이구례)와 김마르다(김마태)가 정식으로 배출됐다. 서울에서 천민의 여종 출신으로 태어난 이그레이스는 어릴 때 괴사병에 걸려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자였다. 함께 예모식을 치른 김마르다의 경우도 남편에게 폭행당해 오른손 손가락이 없는 장애자였다. ” 

작년 9월 30일부터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 전시 ‘여성, 세상으로 나가다’에서 발견한 내용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100년 전 장애를 가진 여성이 간호사란 직업을 가졌다고? 몸이 불편한 환자를 돌봐야 하는 직업이라면 당연히 비장애인일 거라는 나의 편견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지금 보다 훨씬 개화가 덜 된 그 시기에 간호사가 될 수 있었던 걸까. 궁금해서 자료를 더 찾아봤다. 김마르다(KIM Martha)와 이그레이스(LEE Grace)는 모두 환자의 신분으로 처음 보구여관(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을 찾아왔다.  

김마르다는 치료를 받으며 낮에는 가사를 돕는 명분으로 병원에 고용됐고 밤에는 입원 환자를 보살피는 의료 보조인으로 활동했다. 다리가 불편했던 이그레이스는 당시 여의사였던 로제타 홀과 커틀러로부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은 뒤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낮에는 이화학당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보구여관에서 의료보조를 했다. 

두 사람 모두 1903년 간호원 양성소가 설립되자 최초의 학생이 됐고 1회 졸업식의 주인공이 됐다. 이그레이스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평양 자혜의원에서 산파 교육을 이수하고 1914년 처음으로 의생 면허(한의사 면허)를 획득했다. 남자 의사와 동등하게 국내에서 면허를 받은 최초의 여자 의사였다. 

전시회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근 100년 사이에 현대 한국 여성의 삶을 바꾼 직업 변천사를 다루었다. 최초의 여의사·여기자·무용가·소설가·미용사·도배사·법조인들의 이야기 속에는 이들이 당시 감내해야 했거나 부딪혀 싸워야만 했던 편견들이 넘쳐났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마음 저변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편견은 또 있었다. 지난해 11월의 일이다. ‘인정 투쟁:예술가 편’이란 연극을 봤다. 출연 배우 7명 모두가 장애인인 연극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이는 휠체어를 타고 어떤 이는 어눌한 어조와 몸짓으로 무대를 누볐다. 

연극이 끝난 후 이어진 출연 배우들과의 대화 시간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장애와 상관없이 예술가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란 점이다. 어디 예술분야 뿐이랴. 그런데도 처음 제목을 보고 출연진들이 모두 장애인이란 걸 알았을 때 장애인들만의 문제로 국한시키려 했던 내 편견이 부끄러웠다.  

출연배우들은 장애인 극단 ‘애인’ 소속이었고 그중 한 명은 객원 배우로 출연한 변호사 김원영 씨다. 극단 애인이란 이름은 장애인에서 가로막을 장(障)을 뺀 이름이라고 한다. 

짧게는 지난 1년, 다양한 매체를 통해 편견을 부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대학 총장, 의족을 달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달리는 중학교 체육 선생님, 청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남자 프로 테니스 대회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덕희 선수 등.. 

이들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들이 ‘넌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쉽게 단정 지었던 편견을 몰아낸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보니 올해 탄생 500주년이 되는 작곡가 베토벤도 자기가 쓴 위대한 작품을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이었다.

“편견의 문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은 그 문을 부수는 것이다.”

1967년 미국 역사상 흑인 최초로 연방 대법원 판사가 된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의 명언이다. 선입견과 편견을 부수고 나면 세상을 향한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2020년에는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 나오는 우즈 비행사 버즈처럼 ‘날아보자 무한 너머로! (To infinity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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