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신산업 주체이자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과학기술인 협동조합이 주목 받고 있다. 과학기술인 협동조합은 이공계 인력이 주로 조합원으로 참여해 과학기술 관련 서비스 등의 활동을 하는 협동조합이다. 정부가 2013년부터 본격적인 육성에 나서면서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인 협동조합만 350개에 달한다. 최근에는 기존 사회적경제기업에 과학기술의 효율성·경제성을 더해 더 큰 시너지를 내려는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이에 본지는 <2018 과학기술인 협동조합 우수사례집>을 통해 과학기술인 협동조합 지원센터가 주목한 과학기술인 협동조합 10곳을 연속 소개한다.

21세기에도 우리는 여전히 중요한 지식을 책에서 얻는다. 공부를 하든 자기계발을 하든 그 시작은 언제나 책이다. 세상 어디에나 책은 넘쳐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얘기다. 원하는 책을 원하는 때에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불편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IT 개발자 출신의 시각장애인들이 독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뭉쳤다. 크라우드소싱 방식의 시각장애인용 e북 제작 플랫폼을 오픈한 지 1년여. 그 사이 4,000여 권의 책이 보급됐다. 시각장애인의 독서 갈증을 해결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기술적 토대가 갖춰진 만큼 앞으로 책 보급 속도는 더 빨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시각장애인의 지식 자원 접근 방법을 고민하다

언제든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것이 책이라 생각했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2017년 기준 국내에 등록된 시각장애인은 25만여 명. 이 가운데 인쇄도서를 읽지 못하는 중증 시각장애인은 4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책을 구입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다. 종이 점자책으로 출판된 책을 구입하거나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제작을 신청할 수 있다. 문제는 점자책으로 출간되는 책이 전체 출판도서의 5%도 안 된다는 점이다. 수량도 적지만 필요할 때 책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국립장애인도서관에 필요한 책을 신청해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린다. 단적인 예로 대학 수업교재를 학기 초에 신청하면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나 책을 받을 수 있다. 국가적으로도 투자를 하고 있지만 시각장애인들의 독서 갈증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첨단 IT기술로 해결해 보자는 것이 IT로 시각장애인 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김정호)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다. 조합은 오랜 기간 친분을 쌓아온 컴퓨터 프로그래밍, 웹기획, 프로젝트 매니저 등 IT 분야 개발자 출신의 시각장애인 6명으로 구성된 비영리 사회적협동조합이다. “돈 버는 일만 생각하지 말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김정호 이사장의 설명이다. 

2015년 5월 출범한 IT로 시각장애인 사회적협동조합은 IT기술을 활용해 ‘필요한 책을 얼마나 빨리 만들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췄다. 디지털 점자 단말기를 연결해 읽거나 음성서비스를 제공하는 시각장애인용 맞춤형 책자 ‘데이지(DAISY) 북’ 제작으로 가닥을 잡았다. 데이지 북은 시각장애인이나 읽기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e-북의 일종이다.

조합 직원, 자원봉사자(일반 대중=크라우드)가 힘을 합쳐 만든 e북 제작 프로젝트 1년여의 개발 기간 끝에 지난 2016년 7월 크라우드소싱 방식의 e북 제작 웹사이트인 ‘나누는 책 읽기’를 론칭했다. e-북 제작은 협동조합과 자원봉사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뤄진다. 협동조합 사서들이 책을 골라 OCR(광학문자인식) 기술을 이용해 책 내용을 텍스트로 
변환해 사이트에 올리면, 조합이 자체 개발한 편집도구를 이용해 자원봉사자들이 변환된 텍스트를 원문과 비교해 
오탈자를 확인한 후 데이터를 업로드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책 한 권이 제작되기까지 지금은 평균 열흘 정도가 걸린다. 그동안 석 달 이상 기다려야 했던 시각장애인들 입장에서는 기다리던 책을 훨씬 빠른 시간 안에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렇게 서비스가 안정화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엔지니어들이 밤잠 덜 자면 금방 할 수 있겠지’라고 쉽게 생각했던 김 이사장은 서비스가 안정되기까지 실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IT 개발자들과 엔지니어 출신으로 구성됐지만, 실무에 부딪혀보니 역시나 조합원들의 역량만으로는 힘들더군요. 그래서 프리랜서 개발자를 구하고 좋은 분들의 뜻을 모아 1년 반 정도 베타 테스트 과정을 거친 후에야 겨우 론칭할 수 있었습니다.”

론칭을 하고도 사이트가 안정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사이트가 불안정해서 자원봉사자들이 애써 작업한 데이터가 사라지기도 일쑤였다. 서비스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지금까지는 신청을 받은 책보다는 협동조합에서 각 분야별로 책을 선정해서 제작했다. 자금도 문제였다. 아무리 비영리법인이어도 조합원들의 쌈짓돈만으로는 운영이 힘들었다. 다행히 2017년 삼성전자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사회복지 공모사업 ‘나눔과 꿈’ 사업자로 선정되어 3년 간 5억 원의 지원금을 받게 됨으로써 자금에 숨통이 트였다. 자금 덕분에 전문 엔지니어를 고용해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업무 전반을 관리해줄 정규직 직원도 고용할 수 있었다. 또한 자원봉사자들을 모으기 위한 홍보도 가능해졌다. 더 많은 책을 더 빨리 제작하기 위해서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합은 지난 7월부터 페이스북 홍보를 통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다. 이후 자원봉사자가 꾸준히 늘어 2018년 11월 말 기준으로 등록된 자원봉사자의 수가 6,000여 명에 이르고, 이 중 절반이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더 많은 책을 더 빨리! 서비스는 계속 진화 중

서비스가 안정화되고 자원봉사자가 늘면서 책 제작에 가속이 붙고 있다. 올 한 해에만 2,000여 권을 제작했고, 지금까지 제작한 책이 총 4,030권에 이른다. 2019년부터는 시각장애인들로부터 책 신청을 받아 본격적으로 제작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열흘 걸리는 책 제작기간을 일주일로 단축해 연간 5,000권을 제작하는 것이 단기적인 목표다.

책 제작에 탄력을 받은 김 이사장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아졌다. 우선 내년에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책을 제작할 계획이다. 우선, 시각장애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대학 교제 제작에 나설 계획이다. 학생들이 필요한 자료를 필요할 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김 이사장의 목표다. 두 번째로는 각 분야별로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진입한 책을 제작해 시각장애인들이 변화하는 트렌드를 한 발 앞서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겠다는 욕심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 이사장은 아동용 도서 제작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초등학교 시절 시각장애인용 도서관이 처음 생겼을 때 읽은 첫 책이 《데미안》이었습니다. 점자책이 주로 성인 중심으로 제작되다 보니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너무 부족합니다. 아이들의 사고력과 상상력을 키우는 데 있어 독서가 가장 중요한데 말이죠.”

그래서 앞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은 물론이고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교양도서와 인문도서를 계속해서 늘려갈 계획이다.

한편에서는 성실 자원봉사자를 가려내는 것도 과제다. 자원봉사자들마다 작업의 질이 다르다 보니 이것을 관리하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성실 자원봉사자들을 가려내 이들이 일반 자원봉사자들의 작업 내용을 감수하는 시스템을 정착시켜 나갈 계획이다.

김 이사장은 시스템이 안정화되어 일정한 수익 모델이 발생하면 지역도서관 등과 연계해 서비스를 더욱 확대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기술적인 토대가 마련됐고, 관리 인력을 확충했으니 이제 성장할 일만 남았다”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김 이사장에겐 또 다른 포부가 있다. 국가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북한이나 저개발국 시각장애인들에게 책 제작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IT 기술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 김 이사장의 설명이다. IT 기술 덕분에 국경의 제한 없이 통신만 연결되면 어디서든 서비스가 가능한 시대다. 기술을 통해 책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면 시각장애인들이 사회의 주류로 올라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IT로 시각장애인 사회적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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