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서대문구 수색로27 가좌역 역사 안으로 와주세요.”
인터뷰를 요청하니 경의중앙선이 운영되는 ‘가좌역’으로 와달라는 답변이 왔다.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교통카드를 찍는 기계음, 열차가 달렸다가 정차하며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사무실이 맞나?’ 갸우뚱하는데, ‘가좌역 소셜벤처 허브센터’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허브센터는 서대문구와 한국철도공사 서울본부가 업무협약을 맺고, 지난 9월 시설을 리모델링해 조성한 공간이다. 약 186.13㎡(56평) 전용면적에 6개 사회적경제 기업이 저렴한 임대료로 입주했다. 예비사회적기업 ‘㈜소이프스튜디오(이하 소이프)’도 104호에 둥지를 틀었다. 가좌역 내부의 기둥, 벽 등에 입주 기업들을 소개하는 디자인 작업물을 소이프가 직접 제작했다.
보호종료 아동 ‘후원’ 아닌 ‘자립’ 위해 설립한 회사
소이프는 의류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고대현 대표가 보호종료 아동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2017년 설립한 디자인 회사다. 2014년 아동 양육시설에서 사진 봉사활동을 하던 고 대표가 취약계층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과 고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이들을 돕기 위해 기업을 설립했다. 회사명 ‘SOYF(Stand On Your Feet)’에는 ‘너의 발로 스스로 딛고 일어서라’는 뜻을 담았으며, 디자인 중심의 직업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한다.
소이프에서 주목한 ‘보호종료 아동’은 만 18세가 되어 보육시설에서 퇴소해야 하는 청소년들을 말한다. 부모의 이혼과 방임, 경제적 사정 등 여러 이유로 시설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가 되면, 법적 보호가 종료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보육시설을 퇴소하는 청소년의 수는 2016년 2703명, 2017년 2593명, 2018년 2606명으로, 매해 2500명 이상이 사회로 나오고 있다.
보호종료 아동들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거나 월 30만의 자립수당, 국비장학금, 전세자금 제도 등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제도를 알지 못해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지원금에 너무 의존해 자립의 의지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고 대표는 “이들에게 금전적?물질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어른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친구는 휴대폰 요금 100만원이 밀려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친구에게 대출 사기를 당해 빚이 1000만원이 됐어요. 또 다른 친구는 갑자기 맹장이 터져 응급실에 갔는데 보호자가 없어 수술을 못 해 저에게 연락을 했고요. 아이들이 이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변에서 도움을 줄 만한 어른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까웠어요. 한 마디 조언으로 이 친구들의 삶이 변할 수 있는데, 어른들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디자인’ 교육 통해 자신 돌아보고 꿈 찾는 아이들
소이프는 보호종료 아동들이 스스로 일어나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도록 ‘디자인’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에게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 프로그램을 교육하고, 양말이나 티셔츠, 가방 등 제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해 경험을 쌓도록 한다. 실제 UI 디자인에 적성을 발견한 한 친구는 현재 일본 유학까지 준비 중이다.
디자인 교육의 핵심 커리큘럼은 ‘나 자신을 브랜딩하라’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오고, 각자의 생각과 특징을 담아내도록 한다. 고 대표는 “디자인 분야로 취업이 아니더라도 나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며 “적성과 상관없이 아무 공장에 취직했다가 금방 그만두는 아이들이 한번이라도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랐다”고 말했다.
처음 소이프를 설립할 때 비영리재단, 사단법인이 적당하다는 말도 들었지만, 아이들에게 ‘자립’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수익’을 내는 주식회사를 택했다. 누군가의 후원이나 도움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스스로 서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제품들은 주로 온라인을 통해 판매된다. 특히 지난달 12일부터 ‘네이버 해피빈’에서 진행 중인 민화 양말?티셔츠 크라우드펀딩은 이달 11일 기준 목표금액 512%를 초과 달성하며 주목받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 디자인한 ‘1919 티셔츠’ 크라우드펀딩 역시 지난 7월 ‘텀블벅’에서 목표금액 141%를 달성했다. 당시 판매수익의 일부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기부 이후 재단에서 고맙다며 아이들에게 감사장을 주셨어요. 보호시설 안팎에서 늘 후원을 받기만 하던 아이들이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자신들이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판매하고 좋은 취지로 기부까지 하니, 기존에 느끼지 못한 성취감을 얻었죠.”
인식 개선 위한 토크 콘서트, 연결 경험 주는 허들링 커뮤니티
지난달 22일에는 문화?예술 사회적기업 ‘명랑캠페인’과 손을 잡고, 보호종료 아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토크 콘서트 ‘꽃길만’을 개최했다. 가수 션을 비롯해 배우 박영수?김다흰?임승범 등이 참여해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였다. 보호종료 아동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기업 ‘브라더스 키퍼’, 미국의 비영리단체 ‘LBTO’ 등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소이프는 보호종료 아동에 대한 실질적 제도 개선 등을 이끌기 위해 매해 토크콘서트를 개최한다는 목표다. 고 대표는 “같은 목적을 가진 여러 기업, 단체가 한데 모여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며 “우리가 조금 무모하게 사업을 시작했다면, 앞으로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돼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직업 교육 외에도 매월 통장 개설, 부동산 계약, 집 인테리어, 반찬 만들기 등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허들링 커뮤니티’를 운영 중이다. 현재 18명의 아이들이 커뮤니티에 참여해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고 누군가와 연결되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 현재 2020년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할 아이들을 모집하고 있다.
보호종료 아동들과 지역 청년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주택’을 비롯해 소액대출, 법률상담 등 이들이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사회적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고 대표는 “도움을 받고 싶은 아이들과 도움을 주고 싶은 어른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소이프가 해나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는 10명, 100명 최대한 많은 인원을 지원하는 걸 성과라고 하는데, 사실 아이들에게는 자기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나에게 시간을 내주고 안부를 물어주는 이에게 살아갈 힘을 얻으면, 아이들이 바로 설 수 있지 않을까요?”
사진. 전석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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