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이 아니라 일반 통·번역 회사로 시작했다면 여러 경쟁업체들 속에서 우리가 지속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주변 선배 협동조합들이 이끌어 주고, 지역의 다양한 조직들과 협력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통·번역 프리랜서들이 모여 만든 번역협동조합의 최재직 사무국장이 설립 7년차에 밝힌 소회다.

번역협동조합은 통·번역 프리랜서들이 모여 만든 협동조합이다.

번역협동조합은 2013년 5월 통·번역 프리랜서와 기술자문을 할 전문가들 21명이 의기투합해 문을 열었다. 언어를 전공하고 다른 일을 하던 최 사무국장이 통·번역사로 일하던 배우자를 보면서 이 시장 문제에 눈을 떴다.

“번역료의 상당 부분을 번역회사가 가져가는 걸 보면서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혼자서 일하는 통번역 프리랜서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방법 혹은 통번역 업계의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고 과도한 수수료를 줄일 수는 없을까 고민하던 차 협동조합을 알게 됐죠.”

통·번역 중개과정을 간소화해 조합원에게는 정당한 몫을, 이용자는 그만큼 높은 품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하며 탄생한 게 번역협동조합이다.

?사무실 없이 조합 운영, 조합원에 정당한 몫 챙기기에 더 신경

?번역협동조합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통·번역 프리랜서 협동조합이다. 기존에 없던 모델을 시도하는 거라 과정에서 좌충우돌 하는 시간들도 많았다는 게 최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최재직 번역협동조합 사무국장./사진=진재성

번역협동조합은 따로 사무실이 없다. 프리랜서들이 모여 있다 보니 각자 공간에서 일을 하고 필요 시에는 모인다. 모임장소는 주로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카페를 활용하거나 지역의 사회적경제기업 공간을 빌려서 쓴다. 대신 사무공간 운영 등으로 절약되는 비용은 사무국 직원 인건비 및 협동조합 운영비로 사용하고, 조합원들에게 정당한 몫의 번역비를 제공하는데 더 주력한다.

?사무국에서는 주로 프리랜서 조합원들을 대신해 계약을 체결하거나 조합원들과 공유할 일감을 따오는 일들을 한다. 통·번역 일은 사무국에서 영업을 하기도 하고, 조합원들이 소개해주는 일도 있다. 현재 활동하는 조합원은 총 50명이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베트남어, 태국어, 몽골어로 13개 언어를 통·번역한다. 특히 영어는 전체 일감의 70%를 차지한다. 조합 내에서 해결이 어려운 일은 통·번역 사회적경제기업들과 협력해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 서울민주주의포럼, 아시아 청년사회혁신가포럼,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 등 200여개 국제행사의 동시통역, 순차통역은 물론 각종 보고서, 자료집, 계약서, 매뉴얼, 영상, 출판서적 등 다양한 분야의 번역을 수행해 오고 있다.

?동네국제포럼으로 지역과 소통 시작한 프리랜서들

?번역협동조합은 밥벌이로 통·번역 일을 시작했지만 우리말을 다른 나라 말로,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의 가치를 지역으로 더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도 했다. 서대문구에서 시작한 동네국제포럼이 그것이다.

올해 5회째를 맞은 동네국제포럼 행사에 참여한 지역조직 및 주민들.

“국내에서 많은 국제포럼이 열리지만 대부분 주중에 하거나 접근성이 떨어져서 문턱이 높잖아요. 동네 사는 아이들도 오고 주민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는 국제포럼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이러한 취지로 2015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열리게 된 동네국제포럼은 올해 5회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 지역에 있는 조직들이 십시일반 돈을 내고 기획부터 강사 섭외까지 함께 준비하는 방식이다. 동네국제포럼은 지역민들에게만 좋은 게 아니다. 협동조합으로 시작했지만 프리랜서라는 특성으로 응집력이 약했던 번역협동조합에도 조합을 다시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 통·번역하는 사람들은 남의 일만 받아서 하거나 혼자서 주로 일하잖아요.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조합원들도 함께 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계기가 됐죠.”

초기 조합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2, 3명에 불과했다면, 동네국제포럼을 통해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조합원이 10여명으로 늘었다.

“정기총회 제대로 해보자”...준비한 만큼 조합원 신뢰도 커져

?동네국제포럼을 계기로 조합원 참여의 맛(?)을 보면서 최근 번역협동조합은 협동조합으로서 정체성을 더 강화해가고 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총회 준비다. 번역협동조합은 지난 2월 진행한 정기총회에서 기업 창립 이래 처음으로 총회 자료집을 만들었다. 협동조합 설립 7년, 2014년 처음 정기총회를 개최한지 6년만이다.

“그동안은 그냥 총회 자료를 프린트해서 나눠 주는 정도였어요. 우리 스스로도 총회에 크게 무게를 싣지 않았던 거죠. 총회자료집을 만드는게 뭐 대수냐 싶지만, 신기하게 자료집을 제대로 만드니 마음가짐도 달라졌어요.”

번역협동조합은 올해 정기총회에서 처음으로 총회 자료집을 제작했다. 제작한 자료집을 소개하는 최재직 사무국장./사진=진재성.

협동조합에서 정기총회는 한 해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승인 받는 가장 중요한 자리다. 이전에는 소소하게 진행했던 총회를 올해는 이사, 사무국, 조합원이 다같이 함께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준비 과정도 더 꼼꼼히 이뤄졌다.

?공간에도 변화를 줬다.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공간을 대관하고 행사장에는 현수막도 걸었다. 서울시협동조합지원센터 관계자를 총회에 초대해 인사말을 듣기도 했다. 유령조직이 아닌 조합원들이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고민에서다. 3년 전부터는 정기총회가 열리는 날 오전에는 통·번역 조합원 등 관련 전문가들이 모이는 통·번역포럼을 개최한 후 오후에 정기총회를 진행하는 순으로 하고 있다. 조합원들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고민에서 나온 결과다.

“2014년 2월에 처음 정기총회를 할 때는 사람들이 질문을 안했어요. 준비가 너무 미흡하니 질문할 게 없었던 거죠. 지금은 달라요. 우리가 준비를 많이 할수록 조합원들의 질문이 달라지죠. 질문하는 분도 많아지고 질문도 더 날카로워졌죠. 그만큼 관심이 많아진 거라 봅니다.”

 

번역협동조합은 정기총회 준비 정도에 따라 조합원들의 반응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비슷한 규모 협동조합간 협력으로 지속가능한 구조 만들고파”

?번역협동조합은 최근 매출 정체기다. 4~5억 원대 매출 규모가 3년째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외부적으로 확장이 필요하다는 게 내부 고민이다. 현재 번역협동조합의 주 고객층은 사회적경제, 영리기업, 시민단체, 공공기관 4개 영역이다. 사회적기업 인증을 통해 더 다양한 곳들과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다른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사업도 고민 중이다. 품질관리에도 더 신경을 쓰겠다는 포부다. 지역사회와 여러 사업을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통·번역 기업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체 기업의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다는 게 번역협동조합의 뜻이자 비전이다.

“우리 협동조합이 커지는 방식이 아니라 비슷한 규모의 기업들끼리의 협력으로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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