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가락시장은 전체 규모 16만 평, 2010년 기준 한 해 거래 물량 233만 톤으로 전국 공영시장 거래금액의 4할(4조 7,916억 원)을 자랑하는 거대 시장이다. 국내 시장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물론, 먼 시골에서 집 앞 소매점까지 연결하는 유통의 심장이다. 하루 13만 명의 사람들과 4만 2,000대의 차량들이 시장을 드나들며 각 가정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든다.

가락시장은 1985년, 서울 인구 급증에 따른 생필품의 안정적 공급과 아시아 게임, 서울 올림픽 개최에 따른 도시정비 사업의 필요성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초기에는 용산시장 상인 상당수가 가락시장으로 옮겨왔다. 당시 천계천 세운상가에 있던 전자상들이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그 대안으로 현재의 장소에 외국 자본 투자 방식으로 가락시장을 설립하였다.

청과부류 시장은 가락시장의 설립과 시작을 같이 했으며, 총 거래금액의 74.9%(3조 5,932억 원)를 책임지는 가락시장의 핵심이다. 새벽 2시와 오전 8시, 하루 두 번 경매가 열리는데, 경매자체가 힘든 탓도 있지만 낮밤이 바뀌는 생활로 오후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상인들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 된다. 따로 정해진 영업시간이 없어, 대부분의 상가가 직원을 두고 교대로 근무를 한다.

'한국상회', 정권이 변해도 시장은 남는다
오전 10시 청과부류 상인들은 나른한 하품과 까칠한 얼굴로 경매 물건을 정리한다. 정리가 끝나면 산책을 하듯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몰려오는 잠을 기지개로 떨쳐낸다. 11월 5일 오전 한국상회 송주회 대표(58)를 따라 오전 산책을 나섰다. “언제나 똑같아요. 요즘에나 일요일에 쉬지. 밤 되면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2시 3시면 경매하면서 술 한잔씩 먹죠. 예전에는 잠 한 번 푹 자는게 소원이었다니까요.”

앳된 청년이 용산에서 도매시장을 시작한 해는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해였다. 사회가 어수선할 때였고 많은 것이 바뀌고 있던 시기였다. "우리 형님이 장사를 하고 있었고. 용산시장에 우리 조카 한사람하고 우리 매형 한사람이 노동조합을 설립해 가지고 들어가 있었어요. 그때 시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장사에 매력이 있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삼청교육대를 눈 앞에서 겪었다. “시장에서 과일파는 사람을 잡아가는 거야. 내 친척이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자기 형하고 나하고 여름에 수박장사를 하고 있었어. 과일을 몇 개 팔고 들어가니까 갑자기 사람이 없어졌어. 하루 이틀 되어도 안와. 나중에 3개월쯤 지나니깐 머리 빡빡 깎아서 ‘삼촌 나 삼청교육대 갔다왔어’라는 거야. 경찰서 가서 너는 이쪽, 너는 저쪽. 그렇게 삼청교육대 갔대.”

85년 가락시장 이전 후, 또한번 정권의 바람을 탔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오면서 구리, 영등포로 청과시장 분산화 정책을 시행했다. 도매를 하는 시장이 지금은 11곳에 달한다. 분산화 과정에서 가락시장 상인들은 많은 우려를 나타냈다. 분산화 후 30% 정도의 물량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보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에 독점으로 폐단도 있었는데, 물건이 엉망이 되고, 하주가 제값을 못받아가고.”

30년 과일 장사의 철학,?가락시장 한국상회
현재 가락시장에는 청과물 시장에만 5개의 회사가 있다. 각 상회들은 5개 중 한 곳에 가입해 있는데 새벽경매 입찰에 참여하거나, 지역 농민들과 직접 계약을 하여 개인 위탁으로 물건을 받는다. 한국상회도 두 가지를 병행한다. 초기에는 전라도 지역을 주거래지로 잡아 개인위탁판매에 집중했다. 면 단위로 형성된 작목반과 직접 거래처를 만들어 갔다. 발품을 팔고 물건 선별, 출하까지 확인하며 거래처를 넓혀갔다.

냉동창고도 없던 시절 시골에서 2kg, 3kg 농사를 지은 딸기 등의 물량을 80kg 나무상자에 가득 담아와 팔았다. 삼십 년 전 비만 오면 인근 주부들이 바가지를 들고 와 딸기를 사가곤 했다. 가격이 떨어질 때 구매해 딸기쨈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시절에도 딸기는 한국청과를 살리는 물건이 됐고, 지금까지 개인위탁으로 판매하는 한국청과의 주요 품목이다.

입찰의 경우, 회사에 담보를 두고 그 돈 만큼 외상 구매를 할 수 있는데, 보름에 한 번씩 외상을 갚는다. 하지만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언제나 현금을 가득 만질 수 있어, 쉽게 유혹에 빠진다. 한국청과도 한 때 힘든 시간을 보냈다. “웬만한 일은 조카한테 맡겨놓고 돈 좀 있으니 흥청망청 놀고 술 마시고, 한 6개월을 장사 안 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 말로 정지 먹은 거야. 돈이 없어서.” 그 뒤, 초심으로 다시 전라도 발품을 팔며 가게를 살렸다.

최근에는 친목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개의 고정적인 가락시장 친목계에 참여하는데 용산에서 함께 이전한 상인들이 만든 계도 있다. 어느덧 가락시장의 터줏대감이 된 송 대표. 주변에서 가끔 장사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누구나 와서 2억만 있으면 장사를 하는데, 최소한 2, 3년은 여기 밥을 먹고 해야지, 물건만 사 놓으면 팔 수가 없어.” 무턱대고 뛰어들기보다, '우선 이곳의 가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30년 장사 철학이다.

문의) (02) 449 - 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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