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종로 5가에 위치한 효제초등학교를 다녀왔다. 6·25전쟁이 나기 전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다. 종종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가지는 않았었다. 무슨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 어린 시절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아 선뜻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원효로에서 남정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다. 그리고 청량리로 이사하면서 종로 5가에 효제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이듬해 여름 전쟁이 나는 바람에 졸업도 못 하고 피난을 가야 했다. 전쟁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2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때문인지 그 시기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어쩌다 기억이 난다 해도 앞뒤 맥락이 안 맞을 뿐만 아니라 하도 생뚱맞아 혼란만 더할 뿐이다. 무려 70년 만에 찾아가는 초행길은 기대보다는 서먹함이 앞섰다.

공휴일 오전인데도 경복궁이 가까워지자 길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늙수그레한 택시기사가 현 정권을 향해 버럭버럭 화를 냈다. 광화문에서는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양인지 차가 꿈쩍을 안 했다. 시원하게 달리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인 양 앉은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내 꼴을 보고 기사가 부드럽게 ‘종로엔 왜 나오셨냐’고 말을 붙였다. 나는 선뜻 대답이 안 나왔다. 많은 사람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번갈아 흔들며 법석인데, 한가하게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에 구경 가는 중이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내가 대답 대신 ‘기사님 말씨가 서울 토박이 같아요’ 했더니, 기사가 반색하며 자긴 혜화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교에 다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다닌 효제초등학교를 70년 만에 찾아간다.’고 말했다. 마침 길도 뚫려 택시는 율곡로를 힁허케 달려 종로 5가 쪽으로 우회전을 해 학교 맞은편에서 멈췄다. ‘좋은 시간 되시라’는 기사의 인사말까지 듣고 나는 가볍게 차에서 내려섰다.

현재의 효제초등학교 운동장.

교정은 생각보다 넓었다. 공휴일인데도 운동장에는 한 무리의 소년들이 엉켜서 야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타자가 내지르는 힘찬 구호와 함께 공이 방망이에 부딪히는 ‘딱’하는 경쾌한 소리가 가을 햇살에 어우러져 발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나는 등나무 밑에서 한참을 구경하다 교문 옆의 경비실로 발길을 돌렸다. 심성이 착해 보이는 40대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맞아주었다. 교정을 구경해도 되냐고 했더니, 얼마든지 보시라고 선선히 대답한다. 요즘 들어 어르신들이 심심찮게 오시는데 일전에는 미국에 이민 간 할아버지가 한국을 떠난 지 40여 년 만에 모교를 찾아오셨다고 했다.

나만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모두 죽을 때가 되면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고 싶은 게지. 나는 울컥 마음이 쓸쓸해졌다. 운동장을 끼고 천천히 걸어 본관 앞에 섰다. 한참을 서서 구석구석 살폈으나 눈에 익은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그저 낡은 건물일 뿐이었다. 그래도 헐리지 않고 있어 다행이었다. 정문에서 마주 보이던 강당은 재건축했는지 본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ㅅㅣㄱㅏㅈㅓㄴㅇㅡㄹㅗ ㅍㅖㅎㅓㄱㅏ ㄷㅚㄴ ㅅㅓㅇㅜㄹ ㄷㅗㅅㅣㅁ 1950.9.28

전쟁이 터진 그 여름에 나는 강당에 있었다. 유일하게 기억되는 장소다. 평소에 얌전했던 무용선생이 우리들의 사상을 재교육 하겠다고 나선 참이다. 그 선생은 미처 피난 못 간 아이들을 강당에 줄 세워놓고 뜬금없이 상체를 털어 내라고 했다. 우린 영문도 모른 채, 선생의 구호에 맞춰 앞으로 굽혀 흔들고, 뒤로 젖혀 흔들고, 머리가 산발이 되도록 미친 듯이 몸을 털어 보인 것이다. 그 행위가 우리의 사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관절의 유연성에는 조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우린 쑥부쟁이 머리를 손 갈퀴로 긁으며 무용선생은 진짜 빨갱이라고 쑥덕거리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지금 현장에 와서 따져보니 내 기억이 진짜 맞나 의심이 든다. 강당의 구조가 구체적으로 안 떠오르는데 아이들이 속닥이던 말은 생각난다니 나를 믿을 수가 없다. 되돌아 나오며 혹시나 기억나는 게 있을까 해서 건물을 찬찬히 훑어보았지만, 야속하게도 머릿속은 빈 우물 속 같았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현관도, 교실 위치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사라진 기억 때문에 초등학교의 한 시절이 뭉텅 잘려 나가고 말았다. 어쩌면 나는 이런 상황을 진즉 예측하고 학교를 찾아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냥 물러서긴 뭔가 아쉬웠다. 내친김에 학교에서 아주 가까이 있던, 외갓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찾아 들었다. 큰길과 지척이라 골목 자체가 없어졌나 했는데 용케 그냥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너무 좁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이니 어쩌면 옛날 집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아예 집이 어디쯤 있었는지 가늠도 안 됐다.

오늘날 익선동 한옥 거리./사진=정명식(전통을 사랑하는 대목수)

내 외가는 서울 토박이다. 외갓집은 흔치 않은 구조의 한옥인데 물론 지금 보면 작다고 하겠지만 어린 내 눈에는 대궐 같았다. 대문은 늘 활짝 열려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미음자 구조로 놓인 한옥이었다. 세면대와 나팔꽃이 피어있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방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툇마루에 나와 앉으면 모두가 한 가족 같았다. 외가는 할아버지로부터 외삼촌까지 두 대에 걸쳐 여관을 운영했다. 상호는 광신 여관이다. 네댓 살의 내 기억으로는 노상 사랑채에 담뱃대를 물고 앉아있는 외할아버지가 동전 한 닢을 주면 대문 밖에 마주 보이던 구멍가게에서 알사탕 하나와 맞바꾸곤 했었다. 

그 골목 안의 집들은 거의 한옥이었는데 그 좋은 재목들이 다 어디로 헐려 나갔는지 안타까웠다. 아니면 아직도 어느 구석 시멘트 속에 갇혀 숨죽이고 있는 대들보나 기왓장이 있는 건 아닌지, 덕지덕지 붙어있는 음식점 간판 뒤에 소나무 서까래가 숨어있기를 바라며 나는 헛된 꿈을 꾸어본다. 그래도 여기는 기억의 실마리가 무수하다. 서툴게 비틀대며 달려오던 자전거에 치여 이마에서 흐르던 피도, 외삼촌이 달려와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리던 기억도 생생하다.

청주에서 중학생이 된 나는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와서 한 철을 지냈다. 서울은 새벽을 깨우는 소리가 특별하다. 전차가 달리며 뎅 울려대는 종소리, 레일 위로 굴러가는 바퀴의 달달 거리는 소리, 그 금속성의 소음들을 조용히 누워 들으며 수런수런 밝아오는 방문을 지켜본다. 멀리서 두부 장수가 외치며 흔드는 딸랑딸랑 종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다 이윽고 멀어져간다. ‘아! 고향에 돌아왔구나.’ 뭉클하고 가슴이 설렌다. 

품격 있고 조용했던 광신여관도 휴전 후에는 세월 따라 변해 갔다. 묵고 가는 사람들이 지방에서 올라온 장사꾼인 건 매한가지나 사람 인심은 많이 변해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칠 첩 반상기에 깔끔하게 차려 내오는 밥상을 마다하고 술집을 드나들며 밤에는 낯선 여자까지 불러들였다. 한옥은 벽도 얇고, 방문이라고는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이라 무엇하나 감출 수도 없는 상황인데 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날이 부끄러움을 잃어갔다. 그러니 외삼촌이 풍기문란을 이유로 나의 여름방학 원정을 원천 봉쇄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졸지에 고향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골목을 빠져나온다. 종로 4가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젊은 날을 기억케 하는 보령약국을 지나고 한때 수영에 올인 했던 YMCA 앞에서 주춤거리다 광화문을 향해 빠르게 걷는다. 갑자기 오전에 보았던 집회가 무슨 집회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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