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에서 알파고와 바둑 경기를 펼친 이세돌 9단(오른쪽)./사진제공=구글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의 섬소년. 나이 열둘에 프로가 되어 서른여섯이 될 때까지 열네 개의 세계타이틀을 거머쥐며 정상을 활보해온 천재기사 이세돌이 프로바둑 은퇴를 발표했다(11월 19일 한국기원에 사직서 제출). 한두 해 전부터 심심찮게 은퇴설이 나돌았고 최근,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는 했지만 그가 가진 영향력은 바둑계를 술렁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세돌은 프로생활 24년 동안 한국 프로바둑계에서 벌어진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주변의 평판에 관계없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억누르는 모든 압박에 저항하면서 수많은 화제를 만들어냈으며 옳든 그르든 그런 일들은, 정적으로 가라앉은 바둑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세돌은 최고의 스토리 제조기였다. 정상에 머문 기간이나 타이틀 획득의 숫자로만 보면 조훈현-이창호에 사제에 미치지 못하지만 초대 응씨배 우승으로 한국바둑의 위상을 중국, 일본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조훈현도, 스승 조훈현의 뒤를 이어 한국바둑의 세계제패 20년을 이끈 이창호도 이세돌만큼 강렬하게 바둑계를 뒤흔들지는 못했다.

‘세기의 라이벌’로 꼽힌 중국의 구리와 격돌한 10번기는 올드팬들로부터 ‘바둑의 성자(聖者)’로 추앙받는 우칭위안(吳淸源)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흥행에 성공했고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 mind)의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 맞붙은 챌린지매치 5번기는 21세기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역사적인 승부로 바둑계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다.

야생마 같은 그의 자유의지는, 소속단체 (재)한국기원과 여러 차례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일류프로들의 출전을 전제하는 바둑리그에 불참을 선언하고 동료프로들의 징계결의에 항의하는 의사표시로 6개월 휴직을 단행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로기사회를 탈퇴했다. 프로스포츠 선수 개인이 소속단체에 대항하여 송사를 일으켜 정관과 규정까지 바꾸게 만든 경우가 다른 스포츠계에 또 있는지 모르겠다. 

소속단체와 불협화음을 일으킨 이세돌의 공과(功過)를 따질 생각은 없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승부사로서 그런 이세돌의 근성과 기질이다. 점차 재미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알파고 등장 이후 현대바둑은 점점 더 빠르게 계산력의 우열을 가리는, ‘지지 않는 바둑’의 유형으로 굳어지고 있다) 현대바둑에서 보기 드물게 ‘이기는 바둑’, ‘압도하는 바둑’, 재미있는 바둑‘을 고수해온 이세돌의 가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런 사실은, 구글 딥마인드가 대한민국과 비교할 수 없는 인구와 시장을 가진 중국의 세계최강자를 외면하고 이세돌을 알파고의 상대로 지명함으로써 이미 입증됐고 이세돌 역시 챌린매치 5번기 제4국으로 자신을 선택한 구글 딥마인드의 판단에 자부심을 안겨줬다. 훗날, ‘신의 한 수’로 명명된 이세돌의 78번째 수가, 제대로 응수했으면 통하지 않을 수였다고 해도 그 장면에서 (발생 가능한 기계의 오작동이었든 ‘음모론’에 합치하는 딥마인드의 고의였든)알파고의 실수를 유인할 가능성이 있는 가장 복잡한 수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챌린매치 이전에 중국의 현역 세계챔피언을 불러들여 승리의 검증까지 마친 딥마인드가 원한 것은 단순한 알파고의 승리가 아니라 인류를 열광하게 만들어줄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였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상대가 바로 롤러코스터처럼 짜릿한 승부의 스토리텔링을 갖춘 이세돌이었다. 

소속단체나 동료프로들과의 마찰과 잦은 돌출행동 때문에 저평가됐지만 이세돌은 프로의 쇼맨십을 가진, 거의 유일한 승부사였다. 이세돌은 챌린지매치 5번기가 끝난 현장에서 “인류가 진 것이 아니라 이세돌이 진 것”이라는 마무리소감 한 마디로, 인류의 패배에 충격을 받고 비통해하는 동료, 관계자, 팬들을 위로하면서 ‘공식대결에서 인공지능에 패한 세계최초의 프로’라는 불운을 ‘첨단 인공지능을 상대로 신의 한 수를 보여준 영웅’의 행운으로 뒤집는 감동의 쇼맨십을 보여줬다. 

누가, 감정의 동요가 없는 벽을 상대로 한 악전고투의 승부를 견뎌내고 참담한 패배로 끝나버린 무대에 올라, 이세돌처럼 말할 수 있을까. 결전의 그날로부터 3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바둑의 어떤 프로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얼굴도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독보건곤의 바둑풍운아 이세돌이 떠난 바둑계의 분위기는 스산한 늦가을 그대로다. 바둑계는 곧, 스스로 바둑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그를 잊겠지만 팬들은 또 다른 풍운아 이세돌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세돌은 12월 19일부터 21일까지 NHN의 인공지능바둑 '한돌'과 은퇴기념대국을 가진다. 대국 장소는 이세돌의 고향 전라남도 신안군과 서울로 논의되고 있는데 이세돌이 두 점을 깔고 '한돌'에게 덤 7집 반을 준다(제한시간 각 2시간). 두 점을 접히면서도 덤을 주는 이유는 인공지능의 초깃값 세팅 때문이라고. SBS가 대회 주관과 후원을 맡았고 SBS와 K바둑이 공동 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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