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30대 여성 ‘김지영’ 일대기 통해 차별과 불평등을 그려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출처= 봄바람영화사

 

“엄마, 지금 할 수만 있다면 가장 해보고 싶은 게 뭐야?”
“스키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올라 보는 것.”

“왜 그게 하고 싶은데?”
“점프해 하얀 눈밭을 내려다보는 순간 정말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엄마의 맘속에 ‘나도 스키를 타보고 싶다’는 것이 자리 잡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순간 ‘자유’라는 그 단어가 내 뇌리에 콕 박혔다. 그랬다. 내 엄마에겐 평생 자유가 필요했던 거다. 1936년생. 전쟁을 겪었고 층층시하에 시어머니를 50년간 모셨던 엄마다. 언제가 엄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 내 이야기는 한 권의 책으로 써도 모자랄 거다. ”

어렸을 때 엄마의 하소연은 ‘또 그 타령이네’라는 말로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나이 들어 나도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돼보니 그제야 알겠다. 우리 엄마 참 힘들게 사셨네라고 말이다.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릿속엔 어떤 화려함보다는 가족을 위해 늘 묵묵히 희생했던 모습만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많다. 어렸을 땐 희생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엄마라면.. 여자라면 다 그리 사는 것이란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요즘 82년생 김지영이 극장가의 화제다. 세대별로 남녀별로 느끼는 온도차가 참 큰 것 같다. 별점 테러에서 눈물을 쏘옥 빼낼 만큼 공감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위치는 어디인가를 자꾸 되짚어보게 된다.

80년대에 직장을 다녔고 2000년대 초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까지는 10년이 넘는 공백이 있었다. 직장이란 울타리가 내게 그렇게 소중했던가는 일을 놓고 나서야 깨달았다. 다행스러운 건 나의 딸 세대에서는 미약하나마 진전의 발걸음이 보인다는 것. 내 엄마 세대보다 내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듯이 말이다. 

큰애가 초등학교 때 급식 도우미로 엄마들이 순번으로 자원봉사를 할 때 당시 직장을 다녔던 나에게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시간이 안 되시면 사람이라도 써서 메워주세요.”

난 당시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한 엄마에게 일당을 주고 부탁해야만 했다. 3년 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 난 전업주부가 됐다. 이번엔 이런 말이 돌아왔다.

 “어머니, 바쁘게 직장 다니는 엄마를 대신해 어머니가 좀 더 수고해 주세요.”


직장맘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잘 알았기에 어려움이 있다면 흔쾌히 도와주고 싶었지만 막상 선생님한테 역으로 제안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저 ‘시대를 잘못 타고났네’라고 웃어넘겼다.

큰애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만 보였던 아버지들의 모습이 평소에도 간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학년 초에 실시하는  담임선생님과의 첫 만남 시간에 엄마들의 대잔치 속에 아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런 미약하게나마 보여줬던 변화의 물결은 저 출산에 따른 국가적인 육아정책과 미투 운동에서 촉발된 페미니즘의 물살을 타고 그동안 침묵했던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자든 여자든 누가 됐든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는 불공평한 사회다. 그 희생 속에 핀 꽃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미셸 오바마와 제인 구달과 함께 올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여성’에 선정된 나이지리아 출신 여성 작가 치마만다 온고지 아다치에는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테드(TED) 강연이 영상 조회 수 550만을 넘기며 치마만다 아다치에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주장은 명백하다. 남녀 모두에게 강요되는 성 역할과 성별에 따른 사회적 기대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다라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더 행복하고 더 공정하고 더 자신다워질 수 있는 변화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그가 꿈꾸는 세상이다. 우리 사회에 불꽃 튀는 논쟁들이 극단적인 성대결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떠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인간다움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한다. 

이럴 때 우리가 가장 일차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도구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아닐까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 완벽하게 내가 남이 될 순 없지만 그 작은 노력들이 서로를 향해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올겨울 엄마와 스키장에 다녀와야겠다. 스키점프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고 빼앗겼던 자유의 시간들을 되돌려드릴 순 없겠지만 광활한 눈밭을 걸으며 내가 귓등으로 흘려만 들었던 엄마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며 마음의 응어리라도 풀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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