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내 안의 ‘명예남성’을 의심하면서
[편집장 레터] 내 안의 ‘명예남성’을 의심하면서
  • 이로운넷 = 신혜선 편집국장
  • 승인 2019.11.06 02: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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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소설은 일찌감치 읽었지요. 책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연필로 표지 제목 밑에 줄을 맞춰 써봤습니다. ‘70년생 신혜선’.

저는 지영씨와 띠 동갑입니다. 12년 먼저 살았죠. 나는 지영씨를 얼마나, 어떻게 이해할까. 그럼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이해하고 슬펐습니다. 다만, ‘살아남은 70년생 혜선씨는 지영씨처럼 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삶을 살고 있을까’라고 자문하게 되더군요. 기자생활 25년차인 70년생 혜선씨는 ‘겨우 살아남은 것 뿐’이라는 생각을 한참 전부터 했기 때문입니다. 겨우 살아남았다는. 

모임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 있습니다. “내가 명예남자로 산 거 아닌지, 요새 걱정은 좀 돼. 나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내 안의 명예남자는 세상과 어떤 타협을 하면서, 후배 여자들을 불편하게 했을까.”

40대 초반 데스크가 된 후, 몇 가지 특단의 조치를 했습니다. 이를테면 쓸데없는 회식을 줄였습니다. 미완의 업무 앞에 후배를 꾸짖더라도 모욕적인 말은 가급적 삼가자, 해야 할 일이더라도 과중한 업무 앞에 양해를 구하자. 업무를 분장하는데, 기회를 주는데 공평함. 몸이 아팠던 후배를 부 내에서 함께 지켜주며 일을 나눈 협동정신. ‘나는 절대 앞선 (여자)선배처럼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를 갈았던’ 어떤 각오를 실천한 거죠. 이상하고, 동의할 수 없는 관행을 버리자. 조금 다른 선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도 어느 날 문득, 남자(기자)처럼 살고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명예남자라고 하던가요. 남성중심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가치와 관습. 그것을 알아서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그것을 따르는 여자를 말한다죠.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일반 여성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남성 권력 중심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대변하죠. 82년생 지영씨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어떤 아나운서가 떠오릅니다.

이런 모습은 어떤가요. 친해진 남자 취재원에게 남자 선배들이 하는 것처럼, 직함을 떼고 ‘형님’이라고 부릅니다. 남자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행동을 따라하면서 동화되고 싶은 맘. 여자를 강조할 이유도 없지만, 남자처럼 굴 일도 아닌데. 기자와 언론사회의 특수성일 수도 있지만, 몸으로 배우는 현장은 후자가 유리하다고 분명 느꼈습니다. 남자처럼 사는 게 낫다.

인간(Human)의 기준은 남자(Man)입니다. 어지간한 분류 앞에 ‘여성’이나 ‘여자’가 붙습니다. 여성임원, 여(자)기자, 여자데스크, 여교수, 여가수, 여배우. 10년 전쯤인가, 삼성에서 드디어 공채 1기 '여직원'이 첫 임원이 됐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여성임원 시대 개막’의 맥락으로 기획을 했죠. 취재과정에서 만난 다른 기업 ‘여성임원’ 한 분이 그러더군요. “신기자, 임원이 처음 되고 임원 교육을 받으래. 근데 플랜카드에 여성임원 교육이라고 돼있더라고. 여성임원은 남성임원하고 달라? 뭘 더 신경 쓰고, 뭘 더 주의해야 할까? 직원들 다수가 남자인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여성임원 교육이라고 따로 타이틀을 붙일 일인건가? 헷갈려서. 다들 축하했는데, 그 잘난 승진의 첫 경험에서 ‘내가 여자구나’라는, 일하면서 까먹고 살았던 그 단어를 다시 떠올렸지 뭐야. 한 평생 까먹고 살던 걸.” 그 단어는 다름 아닌 차별이었다고 그 임원은 말했습니다. 고시 패스 여성 숫자가 절반을 넘었고, 국무회의 자리에서 주요 장관을 여성이 맡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절대적으로 남성 중심입니다.

82년생 지영씨는 주변에도 여러 이야기를 남깁니다. 다 끄집어내지 못한 말이 차고 넘쳐 눈물부터 그렁거리는 분들부터 그 조차 딴 나라 이야기인듯, 지금 닥친 고된 노동에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명예남성을 자처하며 그릇된 가부장 문화를 견고하게 지키는데 복무했다고 과잉반성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더 원칙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더 대놓고 응원하고 동료의식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타협하면서 그러지 못한 데 대해서는 반성하고 사과할 일은 없나 돌아봅니다.

미안해요. 선배가 미안합니다, 지영씨. 더불어 살아남고도 병든, 병이든 줄도 모른 채 그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러 지영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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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용 2019-11-06 09:16:57
신혜선 국장님. 이 아침에 참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정독도 했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