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권 CSES 원장을 서울 한남동으로 이전한 사회적가치연구원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이런 연구원은 없었다. 사회적가치란 대체 무엇인가? 측정은 왜 필요한가?”

올해 크게 흥행한 영화의 명대사 한 구절을 패러디해봤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이하 CSES?Center for Social value Enhancement Studies) 나석권 원장(53)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한 줄로 요약됐다. 한국에서 ‘사회적가치’를 전문으로 분석?측정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연구원인 CSES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눈에 보이는 수치로 만드는 일을 한다”고 했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CSES는 SK그룹이 15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비영리 연구재단이다. 2007년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제정되면서 SK에서도 관심을 가졌고, 2013년 그룹 산하 한국고등교육재단에 사회적기업 부설 연구소를 세워 연구를 시작했다. 이듬해 최태원 회장이 저서 ‘새로운 모색, 사회적기업’을 출간하면서 SK는 경제적가치와 사회적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더블보텀라인(DBL) 경영’을 본격화했다.

CSES는 사회적가치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기 위해 기존 연구소를 한층 확대한 개념으로 출발했다. 앞서 25년간 기획재정부에서 공직 생활을 하다가 2017년 SK경영경제연구소로 이직한 나석권 원장이 올해 4월 CSES의 수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CSES는 SK의 미래 경영 방향을 결정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동시에 국내외에 통하는 사회적가치 측정 및 평가 기준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서울 역삼동에서 한남동으로 이사한 CSES의 새 보금자리에서 나 원장을 만났다. 연구원은 대사관과 주택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동네, 남산이 내다보이는 위치에 자리했다. 가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2층 창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경제학 박사’라는 수식어, 25년의 공무원 생활 등만 듣고 무심코 ‘어렵고 딱딱한 인터뷰가 되겠다’는 오해를 가지고 갔다. 그러나 편견은 금세 녹아들었고, 나 원장의 흥미로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7월 30일 열린 사회적가치연구원 개원식. 연구원의 이사장을 맡은 최태원 SK회장(앞줄 왼쪽 5번째)과 나석권 원장(왼쪽 3번째)을 비롯한 사회적가치연구원 구성원들./사진제공=SK그룹

-CSES는 사회적가치를 연구하는 기관입니다. 사회적가치란 무엇이며, 현 시점 CSES 설립의 의미와 역할을 소개해주세요.

▶사회적가치는 ‘무형적 개념’이 때문에 정의하기가 무척 어려워요. ‘인간이란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처럼 백인백색의 답이 나올 수 있고, 누구나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거든요. CSES는 사회적가치라는 무형의 것을 유형화하는 일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일이죠.(웃음) 사회적가치의 이론적 토대, 과학적 결과를 바탕으로 기준을 만들어 안팎으로 확산하고 네트워크를 만들어보려 합니다.

사실 해외 주요 선진국에서는 ‘사회적가치’가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올해 7월 미국 181개 주요 기업이 참여하는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에서 기업의 목적에 사회적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문을 발표했습니다. 앞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락(Black Rock)의 CEO 래리 핑크는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2019년 ‘연례 편지(Annual Letter)’에 “기업의 목적은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라며 임팩트 투자를 강조하기도 했고요. 한국과 아시아에서는 CSES가 선도적으로 사회적가치 분야를 연구하고 논의하는 일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지난해 설립 이후 CSES 조직과 기능이 커지면서 독립 공간으로 옮겨왔습니다. 이전 후 어떤 점이 변화했나요? 구성원들이 하는 업무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세요.

▶장소의 변화는 많은 것을 바꾸는데, 특히 생각이 달라집니다. 한남동으로 확장 이전하면서 CSES가 기존과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도 있듯, CSES는 새 둥지에서 새 시작을 다짐했습니다. 제가 취임한 지난 4월만 해도 구성원이 10명이었는데, 6개월 만에 15명이나 늘어 현재 총 25명이 됐어요. 인력이 늘어난 것만 봐도 그룹 차원에서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죠. 나이?성별?전공?경력이 전부 다르고 다양하지만, 사회적가치 분야에 대한 커다란 열정만큼은 공통적이에요.

이곳 이름을 ‘S-village’라 부르기로 했는데, 사회적가치에 관한 다양한 소통을 나누는 하나의 ‘마을’이 됐으면 해요. 성수동이 ‘소셜벤처의 메카’로 불리는데, 한남동은 ‘사회적가치의 성지’가 되면 어떨까요? 연구원 2층을 개방 공간으로 만든 이유도 사회적가치를 추구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토론하고 교류하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여기서 포럼이나 발표회, 토론회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열어 사람들을 모으고 있어요. 

CSES는 연구 위주의 ‘S(Solution)-Lab’과 측정 중심의 ‘V(Value)-Lab’으로 구성됐습니다. 최근 SK 주요 관계사의 사회적가치를 직접 측정하기 위해 ‘SV측정센터’를 신설했어요. SK 같은 대기업이 창출한 사회적가치는 규모가 커서 측정이 쉽지 않은데요. 그룹 내 SV위원회에서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CSES가 세부적 연구를 맡는 것이죠. 고용?납세?환경?기부?CSR 등 여러 항목으로 사회적가치를 측정하는데, 수치로 내서 비교를 해봐요. 객관적 수치 없이 “그냥 잘해요”라는 건 기업가의 DNA에 맞지 않거든요.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일단 측정해보자. 비교 대상이 생기면 분명 더 발전할 것”이라는 게 최 회장님의 생각입니다.

나 원장의 방에는 ‘BTS’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B(Build) T(Trust) S(Standard)의 약자로 “신뢰를 쌓고 글로벌 기준을 세우는 연구원”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사회적가치를 어떻게 객관적 지표로 ‘측정’할 수 있는지, 쉽게 감이 오지 않는데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무게?질량?거리 등 ‘단위’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모여 ‘이만큼을 미터(m)라고 하자’라고 합의한 일종의 약속이거든요. ‘100m가 어느 정도인가?’ 했을 때 대충 감이 오지만, 사회적가치는 아직 그런 게 없어요. 표준과 단위를 하나씩 세워야 하는데, 지금 만드는 기준들이 통한다면 앞으로 꾸준히 사용되지 않을까요? 사회적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은 가격, 비용, 선호도 등이 있는데, 아무래도 무형적 개념이다 보니 조금씩은 한계가 있어요.

먼저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이 있으면 측정이 쉬워요. 예를 들어 국가에 내는 세금은 정해진 금액이 있기 때문에 수치를 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죠. 시장 가격이 없을 때는 ‘비용’을 따져 봐요. 무언가를 만들 때 들어간 원가를 계산해보면 어떤 게 더 가치가 큰지 알 수 있어요. 둘 다 알 수 없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선호도’를 따져보거나 묻기도 해요.

결국 ‘지불할 의사(willingness to pay)’를 알아보는 건데, 기준을 찾는 과정에는 왕도가 없어요. 상식에 근거해 ‘말이 된다’고 하면 기준으로 삼고 시행착오를 겪는 겁니다. 레코드(기록)이 많이 쌓여야 놈(표준)이 생기거든요. 같은 기준이라도 나이?성별?국가?시대 등에 따라 달라서 가감 작업도 필요할 겁니다. 사회적가치는 기준을 세우기도 측정하기도 다 어려운 일이에요.

-어렵게 평가하고 측정한 사회적가치는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나요?

▶누가 상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심히 사회적가치를 측정할까요.(웃음) 기업 입장에서는 측정한 것은 관리가 가능하거든요. ‘이 부분은 이만큼 와 있네’ ‘저 부분은 조금 더 늘려야겠네’라는 경영의 방향성이 생기고, 우선순위가 바뀌죠. 새로운 데이터나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전략적 행동 변화를 이끌고, 신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할 수도 있어요, 기존에 경제적가치로만 봤던 세상을 사회적가치라는 새로운 안경으로 보면 ‘블루오션’이 열릴 거예요.

SK에서 2015년부터 시행한 ‘사회성과인센티브(SPC)’가 사회적가치 측정을 활용한 대표적 보상 제도에요.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사회성과를 화폐단위로 측정해 그 결과에 비례해 현금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죠. 지난 4년간 188개 기업이 창출한 사회적가치는 총 1078억원, 이들에게 지급된 인센티브는 235억원에 달합니다. 실제 인센티브를 받은 수혜 기업들을 보면,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경제적가치를 내는 방법을 더 전략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더라고요.

CSES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공유’다. 연구 결과를 독점하기(having)보다는 여러 기관?단체와 공유해(sharing) 더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가치를 알리고 전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연구원 벽 곳곳에 적힌 여러 문구들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저와 연구원들이 직접 정한 슬로건을 곳곳에 적어놓고, 계기가 될 때마다 살펴보고 이야기하게끔 하려고 해요. 구성원 다수가 동의한 생각을 토대로 움직이는 건 기업문화 측면에서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먼저 ‘역사를 만드는 곳(Where history is made)’이라는 표현은 CSES가 지금 하는 연구가 100년 후 우리 사회에 한 획을 긋는 일이라는 소명 의식을 담았어요.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CSES가 만든 사회적가치 측정 방법이 향후 사회에 통용되는 날이 온다면, 바로 이곳이 역사가 만들어진 첫 번째 현장이 될 거예요. 

또 다른 슬로건 ‘이기거나 배우거나, 절대 지지 않는다(Win or Learn, Never Lose)’는 일단 시도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의지가 담겨있어요. 세상 대부분 일은 승자나 패자, 성공 또는 실패처럼 이분법적인데 CSES에는 ‘지는 연구’가 없어요. 중간에 실패하더라도 후속 연구를 위한 배움의 작업인 것이죠. 비록 어떤 시도가 틀렸다 하더라도 아무도 내팽개치지 않아요. 아닌 건 아닌 대로 의미가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요.

-향후 CSES를 어떻게 이끌고 싶은지, 계획과 목표를 알려주세요.

▶앞으로 CSES의 주요 목표는 사회적가치 분야의 ‘팬덤’을 만들고 확장하는 거예요. 세계적으로 이 분야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트렌드도 생겨나고 있는데,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지해주는 팬들이 필요해요. CSES가 좋은 연구를 하고 논문을 내서 우리의 사례가 자꾸 인용이 되고 언급되면 팬들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CSES에 모인 구성원들이 열정과 목적의식이 높은 사회적가치 ‘덕후’들이거든요. 저희는 배를 젓기(rowing)보다는 직접 조종(steering)하고, 누가 시켜서(serving) 하기보다는 자발적으로(empowering) 참여합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원장으로 온 지는 1년차이지만, CSES는 2년차에 접어들었어요. 1년차에 의욕적으로 몰입했다가 2년차에 타성에 젖고 슬럼프에 빠지는 것을 ‘2년차 증후군(sophomore slump)’이라 하잖아요. 관리자 입장에서 제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시기가 2년차인 지금이라고 생각해요. 눈에 띄게 확 성장하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갈 수 있는 기반을 잘 다져야 할 때죠. 새 장소에 왔으니 전 구성원들이 심기일전해 새 마음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싶어요.


?나 원장은 “CSES는 다른 조직에 25년간 있었던 나도 있고,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1년차 연구원도 있다”며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사회적가치에 대한 열정 만큼은 같다”고 강조했다.

20년 넘게 공직사회에 있다가 대기업에 온 나 원장은 “SK그룹으로 와서 사회적가치 연구를 하게 된 게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재무부’가 ‘기획재정부’로 이름을 바꾸는 동안 묵묵히 공직자로 일하던 그는 2012년 ‘협동조합 기본법’을 만드는 업무를 맡으면서 사회적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경제 기업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협동조합 법을 만들고 관련 연구와 발표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 된 그는 SK와 인연이 닿아 2017년 처음 민간 기업으로 적을 옮겼다. 두 조직에서 일하는 것의 차이를 묻는 말에 나 원장은 “예산을 받고 업무를 하는 전체적 메커니즘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주위에서 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달라졌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나 원장은 “사회적가치 관련한 연구는 한 기업의 사적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CSES에서의 일도 공공과 민간의 사이 영역에 있다고 본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영어로 공무원을 ‘Pubilic Servant’라고 표현하는데, ‘공공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천성에 딱 맞는 일”을 운명이라 여기며 공공에 이어 민간에서도 헌신하는 중이다.

사진. 박재하 이로운넷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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