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름답다는 말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아니,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아름답다는 말로 꾸며진 대상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최초로 가지고 있었을 그 아름다운 감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겠다. 

언어에도 관성(慣性)이 있어서 오래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면 원래의 의미는 차츰 엷어지고 무덤덤해진다. 항생제를 자주 복용하는 사람의 몸에 내성이 생겨 약효가 점점 떨어지는 증상이나 분초를 되새겨도 부족할 공사, 교통사고 현장에서 흔히 목격되는 안전 불감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시를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 사용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는 언어의 관습(관성, 내성, 불감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러들이는 언어가 바로 시어(詩語)다. 러시아 형식주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에 의하면 시어 즉, 시의 언어란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화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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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만 시의 언어가 갖는 기능은 소통이 아니다. 시어는 오히려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며 소통의 채널을 교란시킨다. 왜 그러는 걸까. 시어의 기능은 일상 언어라는 ‘규범’으로부터 일탈해 사물에 대한 지각(perception)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사물에 대한 지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앞에서 언급한 무수히 많은 반복 사용의 관성, 내성, 불감증으로 희미해지거나 사라져버린 언어 최초의 의미를 회복시키거나 하나로 고착된 그 언어의 의미를 새롭게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림자’를 말할 때 소통을 위한 일반의 정의(定義)는 ‘빛을 받은 사물의 뒷면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늘’이지만 이미 다양한 예술행위(특히 문학, 시)에 의해 새롭게 지각된 그림자의 의미는 훨씬 다양하다. 이를테면 이렇다. 

벽에 부딪쳐야 일어서는 삶이 있다

졸시 ‘그림자’의 전문이다. 보여준 그대로 한 줄짜리 시인데, 일상의 소통을 위한 그림자의 정의와는 다른 생소한 묘사지만 분명히 그림자에는 시가 말하는 특성이 있다. 지상에 선 사물의 그림자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그림자는 늘 바닥에 누워있으나 그림자가 지상에 세워진 또 다른 사물과 맞닥뜨리면 그 사물의 각도만큼 일어선다. 이때 시를 쓰는 사람의 눈에 비친 그림자는, 일상의 소통을 교란하는 시의 언어로서 ‘벽(권력의 억압)’이 되고 ‘민중(일어서는 삶)’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은유다. 

2. 두어 주 전쯤 다녀온 서초동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있었던 이수은 창작 가야금 연주회가 생각난다. 가야금과 피아노, 생황, 피리,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공연이었다. 사제의 연도 없는 나를 제자처럼 아껴주시는 노시인의 초대로 몇몇 지인과 함께 누린 감각의 호사였는데 칠순의 고령에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 

이 새로운 시도는 지난해 여름, 젊은 클래식 피아니스트와 ‘소리의 발견’이라는 주제로 피아노와 시의 협업공연을 했다가 부족한 역량을 절감한 내게, 약간의 시기심과 좌절이 섞인 희망을 안겨줬다. 노시인과는, 짧은 기간, 꽤 많은 여행의 동반자로 쌓인 에피소드가 적지 않은데 그 중 자몽 빛 노을이 좋았던 어느 저녁 한때의 농담은 다음과 같은 시가 되기도 했다. 

최돈선

어느 날 아등바등 안간힘 쓰는 내게 딱하다는 듯 툭, 한 마디 던지시더라

그렇게 어려운가
내 가운데 돈. 가져가게
난 최.선. 다할 테니

늙는다는 것은 몸으로도, 이름으로도 시가 되는 은은한 저녁으로 물드는 일

내게는, 일상이 곧 시다. 우리 삶 곳곳에 시가 숨 쉬고 있으며 무엇이든 시가 된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저 순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그것들을 발견하고 끌어낼 뿐이다. 한동안 사물에 대하여 아름답다는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름답다는 말 대신 그것들이 온전히 깃들어 있는 사람들과 풍경을 이야기하고 쓸 생각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최초로 가졌던 아름다움의 새로운 지각, 아름다움의 복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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