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50503232134&st=view&id=24&bo_class=4&fpage=&spage=&secter=D 

 

“국대안반대는 통일지향적 교육운동이자 민족자주 교육운동이었으며 학원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국대안이 강행되며 생겨난 서울대학교는 한동안 보수적 교수들의 아성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이희수 <미군정기 최대의 교육운동, 국대안 반대운동>중에서

“국대안 반대 운동의 중심 세력을 이룬 유능한 제대 출신 서울대 교수들은 북으로 가 김대에서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각자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고 또 학생들로부터 “수재”로 알려진 교수들이다.” 김기석 <해방 후 분단국가 교육체제형성 1945-1948> 중에서

식민지의 단절, 새로운 학문지형의 탄생

한국 학계는 식민지라는 단절의 시기를 품고 산다. 일제 식민지 36년을 전후로, 나라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변했고, 학문은 유학을 거쳐 각종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공학 및 서양의학과 법학 등으로 변모했다. 그 신학문은 대부분 일본과 중국 및 서양을 통해 들어왔고, 해방이 되자 이미 한반도의 학문지형은 조선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을만큼 변해있었다. 과거제로 유지되던 조선의 성리학 체제는, 식민지를 거치며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됐고, 한자라는 언어로만 행해지던 학문의 소통은 국한문 혼용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의 인문학 위주의 학문체제는 식민지의 단절을 거치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여전히 한문에 익숙했고, 동양학이 대세는 아니었으나 읽고 쓰는 필로로기를 중심으로 하는 인문사회과학의 모습은 중국학문이 아니라 서양학문으로 그 대상만 바꾸어 존속됐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으로 전공만 바뀐채, 인문학이 학문의 전당에서 중심이 되는 모습은 변하지 않은 셈이다.

오히려 이 땅에 새롭게 등장한 학문은 자연과학이었다. 인문학자들에겐 그나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전통부터 식민지 시절 신채호 같은 학문적 선배들의 역사가 존재했지만, 과학기술인에겐 아무런 역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공간에서 처음으로 이 땅에 과학기술의 토양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 등을 통해 서양과학을 배운 유학파였다. 식민지 시절, 교육의 주권은 일제에 있었지만, 그 통제 하에서도 민족학교를 만들려는 노력은 병행됐고, 한반도에도 이공계열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이 꽤 많이 건립됐다. 가장 유명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으로 법문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이공학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치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수원고등농업학교 등의 전문학교들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 학문의 첫 단추, 국대안 반대운동

해방 후에도 한반도는 미군정 통치를 받아야했다. 도올의 말처럼, '미군정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이 되자 미군정청 문교부는 경성대학과 8개 관공립 전문학교 및 1개 사립 전문학교를 일괄 통합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약칭 국대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국대안을 주도한 이는 미군정 문교부 차장이었던 오천석이라는 인물로, 미국 코넬대학교와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거쳐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였다. 미국 유학파였던 오천석은,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후 빠르게 움직여 미군정과 긴밀하게 소통한다. 그는 미군정의 교육담당 대위와 함께 조선총독부 산하의 학무국을 접수했고, 이후 남쪽의 교육계를 장악하게 된다. 

오천석은 박사학위를 '민족 동화 수단으로서의 교육 :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교육 정책 연구'로 받았을만큼 뛰어난 교육정책가였다. 그가 국대안을 구상한 이유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 의학전문학교가 나뉘어져 여러 측면에서 낭비를 초래한다는 이유다. 둘째, 고급 기술 인력의 부족을 매우기 위해 흩어진 고등교육기관을 통합해 종합대학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다. 셋째, 일제시대부터 존속회던 배타적 파벌주의와 연고주의가 학문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천석은 일본의 도쿄대학, 독일의 베를린 대학, 프랑스의 파리대학, 중국의 베이징 대학 같은 한국을 대표할 종합대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천석에 의해 기안되고 미군정에 의해 발표된 국대안은 엄청난 학계의 반대에 부딛혀 걷잡을 수 없는 반대운동으로 퍼져나갔다.

해방공간은 좌익과 우익의 이념대결이 격렬하게 진행중이었고, 국대안 반대운동은 좌익 학생들이 주도해나갔다. 미군정이 국대안을 통해 실현하려던 교육정책의 핵심은, 해방공간 미소가 냉전을 향해 달려가던 국제정치질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반도를 대소 반공기지로 안착시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 질서 속에 동아시아를 편입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교육정책은 이러한 미국의 국익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셈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국은 해방공간에서 좌익 세력의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했고,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기회의 확대와 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보다는 소련과의 이념 전쟁을 위해 교육을 도구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일제 교육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적인 통일 정부의 수립에 필요한 민족민주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군정은 교육 주도세력을 대부분 우익 인사들에서 선발했고, 바로 이런 미군정의 일방적 국대안 강행이 좌익을 중심으로 한 반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천석은 듀이의 철학을 이어받아 주입식 교육에 혁신을 담아 거기에 ‘새교육’이라는 이름을 붙혔지만, 반봉건주의, 반식민주의, 반공산주의을 내세우던 그의 교육철학이 미군정 시기 교육현장에 적용될 땐, 반공 이데올로기만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게다가 미군정기의 교육주도세력은 오천석, 백낙준, 현상윤 등의 미국유학파 출신 엘리트들이 주도했고, 관서 출신의 기독교인과 반공주의자, 지주 이상의 출신 성분, 보수 정치세력, 흥사단원, 친일부역 혐의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친미세력으로 이루어진 교육엘리트들은 기독교, 반공, 보수 우익의 색깔로 미군정과 공조하며 국대안을 한국 교육의 혁신으로 포장해나갔다.

국대안 반대 운동의 좌절과 학문의 분열

1946년 7월 13일 발표된 국대안은 누구도 반기지 않는 미군정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조선인민보>가 반대입장을 내보이고, 교수집단이 반발하면서 민주주의 민족전선, 문화단체 총연맹, 과학자 동맹, 조선 교육자협회 등의 지식인 집단이 반대 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방학중이었지만 학생들도 연이어 성명서를 내기 시작했고, 이어 결성된 국대안 반대 공동투쟁위원회에는 서울대학교로 재편될 각 단과대학 교수 대부분과 서울대생의 90% 이상이 참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법령을 공표 강행했고, 이후 국대안 반대운동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학교수와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등록거부 및 동맹휴업 등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국대안은 해방공간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졸속으로 만들어진 미군정의 고집이었고, 당시 식민지를 거쳐 한국에서 새로운 학문의 꿈을 꾸던 이들에게는 관료주의적 행정이 한국 교육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였다. 

미군정은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등을 휴교조치하고 학생 전체에게 정학 처분을 내린다. 1947년 3월이 되면 서울대 8,040명 중 4,956명이 제명된다. 국대안은 당시 해방공간의 학자들의 꿈을 짖밟는 미군정의 군화발과 같았다. 당시 서울대 물리학자였던 한인석은 국대안이 대학의 자치적인 운영을 부정하고 비민주적이며 관료주의적 행정이라고 비판하며, 오천석을 위시로 하는 친일파 교육엘리트들에게 한국 교육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천명한다. 게다가 미군정은 첫 서울대 총장으로 미국인을 임명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을 빼곤 한국 교육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소련과의 국제정치적 이념대결에 골몰하던 미군정에게,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군인에게 고등교육의 기틀을 만들게 한 미군정의 생각은, 해방공간의 지식인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후 국대안 반대세력은 서북청년단과 문교부 및 경찰당국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탄압을 받게 된다. 빨갱이 색출이라는 반공주의의 공포가 남한을 지배하던 그 시기에, 진보적 민족주의 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월북의 길을 택하게 된다. 한글학자 이극로, 이만규, 정열모가 월북했고,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도 월북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김일성대학의 설립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 많은 지식인이 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 대부분이 과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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