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 농원에서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짓는 조관희씨. 그는 5년째 농사펀드를 통해 영농자금을 조달하고 수확기가 되면 후원자들에게 농산물로 되돌려준다./사진제공=농사펀드

빚을 지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 기쁩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 없이 농사짓는 것에 공감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농사펀드는 농사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정말 좋은 도구입니다.”

농사펀드 1호의 주인공 조관희 농부 이야기다. 충남 부여에서 쌀농사를 짓는 조관희씨는 올해 흑향찰이라는 검은 쌀과 홍진주라는 붉은 쌀을 농사지었다. 흑향찰은 2005년 충남농업기술원과 국제벼연구소가 공동 연구해 육성한 품종이다. 

농사펀드는 그의 새로운 도전에 ‘커피처럼 밥도 매일매일 반찬에 따라 블렌딩해 먹으면 어떨까?’라는 스토리를 입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관희 농부의 농산물에는 ‘고집스런’ 이란 네 글자가 늘 따라다닌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는 그만의 친환경 농법을 강조해 만든 브랜드다.  

 

조관희 농부가 올해 선보인 검은쌀 '흑향찰'. 농사펀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변치 않는 그의 농사철학을 담아 브랜딩했다/ 출처: 농사펀드 펀딩페이지

농사펀드는 도시 소비자와 농부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소비자가 농부의 농사 계획을 보고 영농자금을 투자하면 수확 후 농산물로 돌려받는 시스템이다. 쌀, 고구마 같은 농산물은 물론 미숫가루, 된장 같은 가공식품도 있다. 

지난 2014년 농사펀드 법인이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약 600여 농가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고 여기에 호응하는 소비자는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인증서보다 신뢰가 우선


농사펀드에 참여하는 농부들은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 특이한 점은 친환경 농법을 중요시 하지만 인증서보다는 신뢰를 앞세운다는 것이다.

“현장을 다니다 보니 인증이란 기준 때문에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농부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효율적인 제초 방법 중 하나가 잡초가 나지 않게 비닐을 깔아두는 건데 다 쓴 비닐을 논두렁에서 태운다면 과연 친환경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인증을 받기 위한 활동에만 몰두하다 보니  왜 인증서가 필요한지를 잊게 된 거죠.” - 박종범 농사펀드 대표

 

박종범 농사펀드 대표. 컴퓨터정보통신을 전공한 그는 2003년부터 홈페이지 제작 업체에서 일하면서 농촌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인증서를 받기 위한 편법도 이뤄진다”면서 “잔류농약 검사에 걸리지 않게 이를 제거하는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반대로 본인은 친환경 방식을 잘 유지해 농사를 지었건만 옆 농가에서 친 농약이 넘어와 피해를 보는 등 여러 가지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인증서 하나만으로 친환경 농가라고 규정짓기 힘든 상황이죠.”

 

양보할 수 없는 농사펀드 4원칙


농사펀드에 등록한 농부는 4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제초제를 사용하면 안 되고 직접 농사를 짓거나 생산에 참여하는 시간이 50% 이상이어야 한다. 유전자조작 원료나 불필요한 합성 착향(색)료, 합성보존료가 들어간 가공식품은 안 된다. 수산물과 축산물의 경우 동물들이 자라는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위생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2017년 프립(Frip)과 함께 한 조관희 농부의 손 모내기 체험행사, 약 30명이 모여 농부의 모내기를 돕고 내가 먹을 쌀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길러지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제공=농사펀드

이 밖에도  촉진제와 억제제를 쓰지 않고 자연의 시간으로 농사를 짓고 농산물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때 출하하는 농부를 지향한다. 더 나은 먹거리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와 농사 진행 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농사펀드는 이런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매년 농가로부터 자기 점검 차원에서 보고서를 제출받고 해당 지역의 농가끼리 서로 점검 과정도 거친다. 불시 방문을 통해 성실히 약속이 이행되는지도 확인한다. 

 

우리는 농촌 기획자 .. 목표는 더 나은 먹거리

 

농사펀드는 농사 환경을 개선해 농부들이 걱정 없이 농사를 짓도록 돕지만 최종 목표는 더 나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일이다.

“농부들은 생산 분야에서는 전문가인데 이를 소비자 관점에서 어떻게 잘 팔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이 지점에서 농촌 기획자로서 농사펀드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농사펀드는 작년부터 월간 젤라또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매월 특정 농부의 재료로 특화상품인 젤라또를 만든다. 이달에는 꿀 고구마로 만든 젤라또를 펀딩 중이다. 지금까지 레몬, 땅콩,복숭아를 비롯해 10가지 종류의 젤라또가 출시됐다. 

 

10월의 젤라또인 꿀고구마젤라또. 충남 홍성의 박종권 농부의 베니하루까 고구마로 만들었다.
/사진제공=농사펀드

 

“ 그 달의 한정 상품으로 판매되는 것으로 매월 기다렸다가 펀딩 하는 고정 고객이 50여명 쯤 됩니다. 젤라또 생산자 입장에선 고정 고객들이 생기고 농부는 자기 생산물을 공급할 수 있는 판로가 더 생기는 셈이죠.”

 

농사펀드의 매력은 농부들 입장에선 초기 영농자금을 확보하고 판로가 해결돼 자신의 철학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펀딩이 끝나면 농부들은 모인 자금의 50%를 먼저 받고 수확과 배송이 끝나면 나머지를 받는다. 투자자는 농산물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고 유통단계가 줄어듦에 따라 시중가보다 20% 저렴하게 먹거리를 제공받는 것이다. 
 
이 같은 이점 때문에 해마다 펀딩을 재 진행하는 농부들의 비율은 70%에 이르며 펀딩 액수도 평균 20%씩 증가하고 있다. 회원고객들의 재 구매율도 65%에 이른다. 

하지만 펀딩이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올해 잇단 가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한 무화과 농원은 펀딩 후원자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환불을 해줬다. 

자연재해라는 위험요소가 항상 도사리고 있어요. 그래서 리스크 관리가 필수입니다. 보통 농가들은 3가지 정도의 작물을 심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로 농사를 망치거나 수확량이 줄면 투자자들에게 이 농부의 다른 농산품으로 대체해줍니다. 또는 같은 방법으로 동일한 품목을 재배하는 작목반의 농산물로 대체하기도 하죠. 그도 저도 안 되면 환불해드리거나 후원자들의 동의를 얻어 피해 농가에 기부를 하기도 합니다.”

 
“ ‘덕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요.”


농사펀드는 지난해 10억여 원의 매출을 올렸다. 수익 모델은 투자금액의 15%에 이르는 수수료와 지역에 관심 있는 지자체나 기업들과 함께 농사 관련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이다. 

 대학로 공공그라운드 4층에 위치한 농사펀드 사무실. 에디터들은 농부를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비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이야기를 엮어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박 대표는 최근 푸드테크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관심이 새벽 배송이나 총알 배송 같은 물류서비스에 집중되는 점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농업 분야 스타트업이 주목받고 있지만 먹거리 생산자에 대한 대우나 환경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뒷전입니다. 예를 들어 농업재해보험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 규모가 작은 농부들에겐 언감생심입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지역 농협에서 영농자금을 조달하는데 지원 예산 규모가 날로 줄어들고 있어요. 조건도 까다롭습니다. 자기 땅이 아닌 농부들은 담보물이 없어 대출도 안 되고 농사란 것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자금이 필요하다 보니 융통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농사펀드는 농부들이 좀 더 나은 농사를 짓는데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들을 조금씩 거둬내는 일에 주안점을 두는 한편 귀농청년들의 연착륙을 위한 시스템을 구상 중이다.

 “귀농·귀촌한 청년들이 농사로 자립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농업을 포기하거나 다른 일을 하며 지냅니다. 농사펀드의 주 업무 중 하나가 농부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에디터 기능입니다. 청년들은 미디어를 다루는 툴에 익숙해 지역의 에디터로 활동하면서 특색 있는 농부를 발굴하고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내 준다면 판매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농부들과 친해지고 농사에 대한 노하우도 익히게 되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죠.”

농사펀드와 함께 하는 사람들. 박 대표를 포함해 총 9명이다.  박 대표는 “직원들이 진심을 담아 일해 준 덕분에 결코 쉬운 비즈니스 모델이 아닌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농사펀드는 시범적으로 올해 순창에서 청년에디터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어 춘천, 홍성, 부여 등지에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농부가 걱정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건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소비자 역시 먹거리가 어떻게 길러졌는지 알고 먹는 게 중요하고 그럴수록 먹거리의 품질은 올라간다고 봅니다. 저희가 꿈꾸는 세상은 단순합니다. 농부와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인사를 건네는 문화를 만드는 겁니다. 바로 ‘덕분입니다’라고요....”

사진. 박재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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