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구매 매출이 65%인 이탈리아 사회적 협동조합

페루자는 로마 북쪽 170km에 위치한, 인구 17만명의 지방 중소도시다. 이곳에 1981년에 설립된‘새로운 차원(Nuova Dimensione)’이라는 사회적 협동조합(우리나라로 치면 사회적기업에 해당)이 있다. 노인, 장애인, 청소년, 정신건강, 관광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인데, 2017년 매출이 무려 621만 유로나 되고 인력도 221명이다. 약 40년 가까이 서비스를 해오면서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매출 중 85%를 차지하는 공공구매다. 공공구매로 안정적 매출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서비스 경쟁력을 기반으로 일반 시민 대상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체 매출의 25%를 차지하는 노인 서비스의 경우, 치매 노인 데이케어, 간호 및 돌봄 서비스, 노인 음악 치료 서비스, 도움이 필요한 노인 대상 맞춤형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노인 서비스 중 64%는 공공구매 형태로 이루어지나 나머지 36%의 매출은 차별화된 서비스를 바탕으로 일반 노인을 대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공공구매 비중이 85%인 이탈리아 사회적 협동조합 '새로운 차원'./사진출처=www.nuovadimensione.com

‘새로운 차원’은 정신 및 신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 등 모든 사람들이 휴가 갈 권리를 누리고 여행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기 위해 개인 및 단체 여행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여행 기간 동안 재활, 오락, 유람, 스포츠, 워크샵 활동을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들과 함께 진행하는 서비스다. 취약계층 대상 공공구매 매출도 있지만, 이 분야 매출의 68%는 민간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다.

1991년 사회적 협동조합이 법제화된 이후, 이탈리아에는 2011년 기준(ISTAT 조사) 11,264개의 사회적 협동조합이 있다. 총 고용인원은 365,006명(평균 32.4명), 총 매출은 112억 유로(평균 99만 유로)로 규모면에서 매우 탄탄하다. 또한 조사 당시 6년간 연평균 성장율을 보면, 고용이 6.9%, 매출이 9.8%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경쟁력은 공공구매에서 출발했다. 매출 구성을 보면 공공구매가 65.3%로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민간 고객을 대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한 것은 27.7%이다. 나머지 7%는 보조금, 기부금 등이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차원’의 사례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닌 것이다.

보조금에서 공공구매로 전환한 유럽

유럽에서 1970년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공기관이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지배적 형태는 보조금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보조금을 공공 계약 방식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공공기관은 공공구매를 늘리는 한편, 사회적기업은 공공구매에 응당하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공공구매는 최저가 입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에 EU는 2014년에 공공계약 규정을 제정했고, 이는 사회적기업의 공공구매 참여에 큰 기회를 제공했다. EU의 공공계약 규정은 가이드라인으로, 각 나라별로 별도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에 이탈리아(2016년), 폴란드(2016년), 아일랜드(2016년), 프랑스(2015년) 등에서 EU 공공계약 규정에 준하는 나라별 규정을 만들었다. 특히 영국은 2012년에 제정한 ‘공공역무(사회적가치)법’에 이어 2015년 EU 규정까지 받아들였다. 또한 스페인, 폴란드, 벨기에, 슬로바키아는 이미 자체적으로 사회적기업의 공공조달 참여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규정을 운영해오고 있다.

기업, 밸류체인 연계해 사회적기업 제품•서비스 구매 

기업 역시 사회적기업의 제품과 서비스 구매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소프트웨어 글로벌 기업인 SAP와 사회적기업 ‘전문가(Specialisterne)’ 간의 협력을 들 수 있다. 

SAP와 사회적기업 '전문가'는 2013년 함께 자폐장애인 고용 협약을 체결했다./사진출처=specialisterne.com

‘전문가’는 2004년에 설립된 사회적기업으로, 자폐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역량을 개발하여 IT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로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그들의 고용을 촉진시키고 있다. 덴마크에서 설립되었지만, 현재는 미국,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각국에 지사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에는 ‘전문가’ 모델을 전 세계에 확산하기 위해 전문가재단(Specialisterne foundation)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2025년까지 자폐장애인 일자리 100만개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SAP는 자폐장애인 고용을 통해 사회적기업 '전문가'의 세계적 성장을 도왔다./사진출처=medium.com/sap-tv

SAP는 ‘전문가’와 협력한 최초의 글로벌 기업이다. SAP와 ‘전문가’는 인도에서 먼저 자폐장애인 6명을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 테스터로 고용하는 시범 프로젝트를 펼쳤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2013년 공식 협정을 맺고, 자폐장애인 고용을 위하여 인력 운영 프로세스를 재설계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테스팅, 프로그래밍, 데이터 품질 보증, 데이터 입력 등 10개 분야에 걸쳐 적정 업무를 설계하고, 사전 취업 교육을 6주 진행한 후 고용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19년 현재 SAP는 13개국 28개 지역에서 150명 이상의 자폐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1% 이상이 자폐장애인인데, SAP 역시 이 비율과 동일하게 자폐장애인 1% 고용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사회적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우선구매로 인정

이미 유럽은 최근 20년 동안 보조금을 줄이는 대신 공공구매 비중을 꾸준히 늘리면서 사회적기업 활성화를 꾀해 왔다. 우리나라는 2007년 사회적기업에 대한 인건비 보조로 지원을 시작했으나 보조금 정책은 줄어드는 대신 그 자리를 공공구매가 채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공구매 활성화 내용을 담은 사회적가치 관련 법들이 2014년부터 발의되었으나 아직까지도 계류중인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법제화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준비도 필요하다. 바르셀로나는 시의회가 사회책임 공공 조달령을 발표하기에 앞서 각 관련 주체 40개 기관의 50명 대표자들이 모여 6개월 동안 사회적 협의 과정을 거쳤다. 크로아티아 역시 2년에 걸쳐 워킹그룹을 사전에 운영했다.

사회적기업 제품·서비스가 공공기관 및 대기업이 요구하는 기준을 맞출 수 있기 위해서는 경쟁력 제고를 지원하는 기관이나 중간지원조직의 활성화도 필요하다. CGEP(Clinton Giustra Enterprise Partnership)와 인텔리캡(Intellecap)과 같은 기관에서는 협동조합, 영세농이 기업 납품 기준에 맞추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행복나래가 사회적기업 경쟁력을 도와 대기업 우선구매와 연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8년 기준 190개 사회적기업을 일반 기업과 연계했으며 2012년 이후 누적 기준 1,267억원의 사회적기업 제품을 구매했다. 무엇보다 대기업과 사회적기업을 연계함으로써 사회적기업 제품이 대기업이 요구하는 품질 수준을 맞추도록 함으로써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도록 했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비용의 사회화’를 하지 않는 사회적기업이 일반 기업과 동일하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기에, 이를 공공기관의 공공구매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 구매로 사회적기업이 만들고 있는 사회적 가치를 인정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진석 행복나눔재단 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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