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다섯 명의 여자 형제가 있다. 언니는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에 결혼해서 집을 떠났고, 여동생 셋은 피난살이하던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둘째였던 내가 그때부터 맏이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얘기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태어난 셋째는 살결이 유난히 희고, 통통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날이 무거워지는 동생을 끌어안고 집 근처 무심천 둑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저녁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아기를 돌봤다. 우리 모두 뜨내기 피난살이에 익숙했고 웬만큼 불편한 것은 고생으로 치부하지도 않았다.

여섯 식구에게 턱없이 부족했던 콧구멍만 한 방 두 개였지만 삶은 삶인지라 벌어질 것은 다 벌어졌고, 셋째가 미처 기저귀를 떼기 전 어머니는 또 동생을 임신했다. 그해 여름 끝 무렵, 사위가 어둑해지자 시작된 어머니의 진통이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두 방을 나눈 벽이 제구실을 못해서 전구 하나로 양쪽 방을 밝히려고 벽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끙끙대는 소리가 계속 새어 들어왔다. 밤새 잠을 설친 나는 다음 날 늦잠에서 깨어나 그사이 태어난 동생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로 달려갔다. 

넷째는 유독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눈이 쌍꺼풀졌고 거기에 사시(斜視)였다. 12시와 1시 방향으로 각기 다른 곳을 봤는데 묘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놀리느라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면 그 말을 곧이듣고 섧게 울었다. 내가 청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넷째는 귀염받는 막내둥이였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대학 생활을 접고 화가와 결혼한 나는 바로 아이를 가졌고, 큰아들의 첫돌을 치르자마자 남편이 세계 청년작가대회에 참석한다고 파리로 떠나는 바람에 도로 청주 친정으로 내려왔다. 돌쟁이를 업고 돌아와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머니의 부푼 배였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또다시 임신해서 만삭이었다. 더 기막힌 일은 내 큰아들이 두 살 연하의 이모님을 어른으로 모시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넷째의 막둥이 호시절도 그렇게 쓸쓸히 막을 내렸다.

셋째 여동생, 넷째 여동생, 내 바로 밑 남동생과 그 앞의 막내 여동생./사진=윤명숙

이후에도 결혼생활이 여유롭고 풍족했으면 청주 친정집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동생들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을 텐데, 넉넉지 못한 살림 때문에 청주에 내려가 보지 못한 사이 아이들이 훌쩍 다 자라 버렸다. 다 큰 동생들을 그나마 가까이 두고 보기 시작한 것은 10년의 피난 생활을 정리하고 친정이 서울로 환도하고부터다. ‘환도’라는 단어는 이미 퇴색된 의미라서 이사했다는 말이 옳은 표현이겠다. 어쨌든 친정은 그사이 청주에서 제법 큰 집을 장만했고 사는 형편도 좋아졌는데, 그래도 객지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는지 부모님이 살던 집을 팔고 서울로 올라와 신촌 로터리에 작은 문방구를 하나 인수했다. 가게에서 가까운 신영극장 뒤에 집을 사서 자리를 잡은 덕분에 내게도 비빌 언덕이라는 것이 생겼다. 

부모님의 새집은 가파른 언덕에 지어진 방 세 개짜리 양기와 집이었다. 월세로 쫓겨 다니던 우리 부부는 염치 불고하고 친정집 문간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대학 입시 준비를 하느라 남동생이 청주에 남아 있어서 가능했다. 일 년 후 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오면 방을 내줘야 할 처지였지만, 그래도 전세금을 저축할 천금 같은 시간이 확보된 셈이었다.

6개월마다 집을 옮겨 다니던 불안한 생활을 면하자 나는 살림꾼인 할머니에게 차분히 요리를 배우고 없는 살림을 꾸려나가는 노하우도 전수받았다. 부모님은 문방구를 운영하느라 늘 새벽에 나가 한밤중에 들어오셨다. 당시 신촌 로터리에는 버스 종점이 있었고 문방구에서 버스 회수권과 담배를 취급했기 때문에 좁아터진 가게 안은 꼭두새벽부터 운전기사와 학생들로 늘 바글댔다. 두 분 다 장사가 처음이라서 잘 버텨내실까 걱정이었는데, 장삿속 어두운 아버지는 도리어 정직함 하나로 신용을 얻어 가게가 날로 번창했다. 물론 어머니의 뛰어난 사교술도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두 분이 문방구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내 아래 동생들은 예전에 나와 언니가 그랬듯 할머니 손에서 성장했다. 셋째는 워낙 울기도 잘하고 떼도 잘 쓰는 데다 욕심까지 많아서 누구나 속수무책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막내는 어리고 여리니 당연히 할머니 품에서 늘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넷째는 특별히 가족의 관심을 끌 만한 게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조용하기만 했던 넷째는 어른을 귀찮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넷째가 관심을 끌려고 그랬는지 다람쥐처럼 조용히 문방구를 들락거리며 부모 몰래 계산대에서 잔돈푼을 들고나왔다.

물론 크면서 그 버릇은 자연스레 없어졌지만, 그로 인해 오빠한테 매 맞은 기억이 상처로 남았는지 나이 60이 넘도록 넷째는 제 오빠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오빠가 저만 미워했다고 지금까지도 분해하는데, 당시를 목격한 내가 봐도 아주 헛소리는 아니다. 샌님 소리 듣던 남동생이었건만, 장사하느라 여념 없는 부모 대신 동생들을 챙긴다고 시도한 게 그만 부작용을 일으킨 듯하다. 재수한다고 방구석에서 3년이나 씨름할 때이니 더 예민하게 굴었을 수도 있다. 셋째는 곰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데다 조금이라도 제 탓을 하면 불곰처럼 덤벼들곤 했으니 감히 건드릴 생각을 못 했을 것이고 막내는 어리고 귀여워서 혼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 넷째는 눈치는 빤한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잔머리만 굴리니 눈에 띌 때마다 혼을 냈을 터이다.

비록 가족의 관심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넷째가 예쁜 처녀로 성장하는 데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예능 쪽으로는 기대치를 넘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의 홍익 전문대에 들어갔다. 내가 우긴다고 4년제 대학을 쉬이 포기하고 전문대에 간 넷째를 생각하면 사실 지금도 마음이 불편하다. 동생들을 빨리 치울 생각만 하는 대신 크게 키울 생각을 했다면, 걔들의 삶이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그러나 여자라면 어서 결혼을 시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기던 시대였다. 졸업 후에 하는 일 없이 엄벙덤벙 지내던 넷째를 일 년 가까이 내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나는 살림을 가르쳤다. 부족한 자존감도 키우고 사교술도 익히게 해서 훌륭한 집안에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연애 한 번 못해본 셋째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우선 셋째부터 치워야 했다. 마침 남편 제자 중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한 성실하고 외모 수수한 노총각이 하나 있었다. 부산이 고향이고 여섯 형제의 장남이라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워낙  맘에 들어 놓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나는 동생들을 불러 만두를 빚게 하고 그 총각을 초대했다. 격식 없이 주방 아랫목에 불러 앉혀 놓고 내 막내딸까지 합세해 여자들 넷이 떠들썩 분위기를 띄웠다. 여자들이 둘러앉아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는 중에 큰 대접에 만두 20알이 둥둥 뜬 뜨거운 국을 꾸역꾸역 목 뒤로 밀어 넣기 바쁘니 총각은 처녀가 둘이나 얼쩡거려도 곁눈질을 할 새가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어느 집이나 만두를 좋아하고 누구나 그 정도는 먹어 치우는 줄 알았다. 부산 사람들이 만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나중에나 알게 되었다.

우물쭈물하다 발등에 불 떨어진 셋째를 구슬려 정성껏 화장시키고 옷도 세련되게 골라 입혀서 자그마치 11번이나 녀석을 맞선 자리에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번번이 성사가 안 됐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12번째 맞선 자리에는 따라나설 힘이 없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알아서 하라며 모르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촌역 광장에서 딱 한 번 만난 사람에게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서로 첫눈에 반해 넷째보다 먼저 결혼 날짜를 잡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저 혼자 내보낼 걸 공연히 나만 헛수고 한 셈이다.

지나고 보니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 아롱이다롱이 여동생들을 치우느라고 동분서주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형제라고는 머리 허연 남동생과 넷째만 곁에 남아 있다. 굼뜨던 셋째는 제일 빠른 행보로 저세상에 갔고, 막내는 캐나다로 이주한 지 오래됐으며, 언니는 요양소 신세를 지게 된 지 한참 됐다.

KBS 방송국 PD로 천재(?) 소리 듣던 남동생은 암 투병 중인 마누라 따라 여기저기 요양병원을 옮겨 다니면서 ‘사는 게 뭔지’를 늦게나마 배우고 있고, 중년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건재한 넷째는 어린 시절과 다름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제 분수를 지키면서 살고 있다. 빠른 눈치는 순발력으로, 잔머리는 지혜로 거듭나며 사위어가는 윤 씨네 딸들의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지키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