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시대'와 '현대과학'의 표지./사진=한겨레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을 주어야 하겠어요” 이광수, <무정> 중 개화론자 형식의 대사

“자연과학은 철학, 예술과 같이 일정한 사회조직 즉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여경구, 1946년 <인민과학> 창간호에 실린 글 중에서
 

해방 공간과 과학기술단체의 난립, 이념을 마주한 과학기술인

20세기는 이념의 전장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여러 이념들이 얽혀 갈등하고 반목하며 부딪히는 용광로였다. 독립운동 또한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의 여러 이념으로 나뉘어 전개됐다. 식민지 시대, 일제는 조선인 과학기술인의 양성에 힘을 쏟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를 통털어, 과학기술을 대학교 수준 이상으로 공부한 조선인은 400여명 뿐이다. 이들 대부분이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유학한 사람들이었다. 이공계 박사는 10여명 뿐이었다. 해방 당시 이런 인재들을 모두 통틀어, 과학기술인력은 약 2000 여명, 식민지였던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해방이 되자, 식민지에서 억압받던 과학기술인들도 다른 민족단체들처럼 생기있게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주요 기관들에는 자치위원회가 생겼는데, 이때 과학기술계에도 조선기술연맹, 조선학술원 등의 단체들이 설립된다. 이 중 가장 먼저 생겨난 과학기술 관련 단체는 조선학술원이다. 조선학술원은 학술계의 모든 부문을 포괄한 단체로, 과학기술 부서로는 이학부, 공학부, 농림학부, 기술총본부 등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학술원의 목표 제 1항은 다음과 같았다. “본원은 과학의 모든 부문에 걸쳐서 진리를 탐구하며 기술을 연마하야 자유 조선의 신문화 건설을 위한 연총(모든 것이 샘솟는 연못)이 되며 나아가서 국가의 요청에 대한 학술 동원의 중축이 되기를 목적으로 함.” 조선학술원은 해방 바로 다음날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적 포부와 사회의 변화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공학자들은 조선공업기술연맹을 결성했다. 조선공업기술연맹에는 국가의 공업발전을 돕기 위한 기술자 양성과 배치를 목적으로, 광산부, 야금부, 전기부, 연료부, 통신부, 건축부, 기계부, 섬유부, 화학부, 요업부, 식품부, 공예부 등으로 구분됐다. 당시의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분야를 총망라하는 구성을 지닌 대단한 조직이었다. 과학자와 공학자가 함께 조선과학기술연맹도 비슷한 시기에 결성됐다. 이 단체는 “과학기술자의 총역량을 결집해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과학기술자들을 적정 배치하며, 산업과 생활의 향상을 꾀하고 아울러 과학기술자가 진보적 소양을 갖추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946년에는 조선과학기술협회도 설립됐다. 해방이 되자, 과학기술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자발적으로 과학기술단체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해방 공간은 격동기의 정치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과학기술 단체들은 다양한 이념이 난무하는 정치단체들로부터 매번 지지를 요구받거나 동참을 강요받았다. 해방정국의 과학기술자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소극적이었지만, 시대는 과학기술자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과학기술단체들은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과 지향을 표현했고, 이는 당시 창간된 여러 기관지와 과학잡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발언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1947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전국과학자대회에서 사회과학연구소, 조선과학자동맹, 조선경제연구소 등이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과학동맹’을 결성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해외의 과학기술자들도 <과학과 기술>등의 잡지를 창간하고 새롭게 태어난 조국에서 해외과학기술인의 역할을 주장했다.

해방 공간 과학기술을 위한 세 가지 이념 - 민중, 국가, 그리고 건설

해방 공간은 혼란스러웠고, 과학기술자들은 사회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보여준 이념적 스펙트럼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 과학기술 연구는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이윤 추구의 수단이 돼서는 안되며, 철저히 공익에 봉사하며 민중의 실생활과 연결돼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들에게 과학기술은 민중의 실생활과 분리돼서는 안되는 학문이었다. 둘째, 과학기술자들의 정치적 참여를 비판하면서 과학기술자들은 이념에 편향되지 않고 국가의 발전을 위한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국가의 발전이었다. 셋째, 과학기술 자체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흐름이다. 사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은 민중도 국가도 상관 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이 길을 갔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학기술의 기반을 먼저 건설해야 민중도 국가도 찾을 수 있다는 상식적인 주장을 하던 대부분의 과학기술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런 목소리들은 당시 출판된 주요 과학 잡지와 단체의 기관지들에 실려 있는데, 당시 널리 읽힌 주요 과학 잡지로는 <대중 과학>, <현대 과학>, <과학 세기>, <과학 나라>, <과학과 발명>, <인민과학> 등이 있다.

해방이후 조적된 다양한 과학기술단체들은 이념과 정치적 성향에서 서로 다른 지향점과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일치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과학기술은 새로운 조국에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었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해방구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이었다. 김동광은 그의 논문 <해방 공간과 과학자 사회의 이념적 모색>에서, 당시 과학기술자들의 활동이 지닌 함의를 몇 가지로 구분해 설명한다.

첫째, 당시 난립했던 과학기술인단체들은 비록 혼란스러운 형태로 존재했지만, 식민지 시기 억압된 과학기술자들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폭발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회참여라고 해석돼야 한다. 특히 당시 가장 적극적이고 활발했던 단체의 과학기술자들은 이념적 성향이 강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이는 해방정국에서 과학기술자들이 결코 정치적으로 소극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해방 공간의 과학기술인 운동은 지식인 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당시 과학기술자들은 신탁통치, 단정 수립 등의 민족적 의제에서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했으며, 이는 과학기술자들이 조선학술원, 조선문화단체총동맹, 민전, 과학동맹 등의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지식인들의 연합전선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학기술자들은 이러한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여러 의제에서 이들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과학기술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학문이었고,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이념이 될 자격까지 갖추고 있었다. 바로 그런 역사적 공간에서, 과학기술자들은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함께 움직인 지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민과학' 창간호./사진=한겨레

해방 공간의 진보적 과학기술인, 왜 그들은 좌파였을까

문재인 정부 들어 이제서야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대부분 좌파이자 강한 진보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던 해방 공간의 과학기술자들 또한 재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해방이후 한반도를 지배하던 가장 강력한 이념은 사회주의였다. 당시 과학기술자들도 어쩔 수 없이 소련과학아카데미 등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 모두 첫째,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신생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고, 둘째, 대중들에게 과학을 교육해 반과학주의와 비과학적 태도를 척결하도록 계몽하고, 셋째,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공통의 주장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이었고 대부분 좌파에 가까운 정치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식민지에서 일본의 통치를 받았던 과학기술인의 정치적 성향이 진보적 색채였던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신생 조국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한다는 당위에 머물지 않았고, 해방된 조국의 과학이 식민지의 과학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새로운 과학에 대한 지향점은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월북후 흥남공업대학 교수 및 흥남연구소장을 역임했던 여경구가 <인민과학>의 창간호에 쓴 “과학기술의 진로”라는 글에 담겨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과학은 철학, 예술과 같이 일정한 사회조직 즉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연과학의 기원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불가결한 생활수단의 탐구에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민과 분리되고 이데올로기와 분리되어서는 과학은 존립할 수 없다. 따라서 과학자는 그 학문연구를 첫째, 대중과의 관계에 있어서, 둘째로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 있어서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진보시킬 필요를 통감해야 한다.. 우리는 대중의 물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다. 우리는 일하는 인간을 계산단위로 여기고 기계적 조직의 부속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의 기계문명과 같은 혼빠진 문명을 건설할 생각이 전혀 없다.”

여경구의 새로운 과학에 대한 설명은 명쾌하다. "해방 공간의 새로운 과학은 대중 혹은 인민과 유리돼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대중과 인민의 힘으로 지지돼야 한다. 또한 자연과학은 다른 이데올로기와 분리돼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사회로부터 고립돼 존재할 수도 없다." 여경구는 이미 20세기 중반, 과학이 왜 사회에 스며들어 사회와 함께 존재하며, 또한 사회를 보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돼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2019년 한국의 과학기술은 분명 양적?질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전쟁을 겪고 또 군사독재라는 비극을 경험하면서, 사회 속에서 당당하게 과학의 사회적 의미와 실천을 강조하던 선배 과학기술자들의 경험과 사상은 희미해졌다. 어쩌면 오늘날의 한국 과학기술인들은 해방 공간의 과학기술인 선배들보다 정치적으로 나약하고, 이념적으로 무능하며, 함께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연대조차 지니고 있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과학은 한걸음 퇴보했는지 모른다.

해방 공간에서 화학공학자로 그리고 이후 기술관료로 한국 공업정책에 기여해서 한국 과학기술인 전당 16인 중 한 사람으로 올라 있기도 한 안동혁은, A.D.H라는 이름으로 <과학시대>, <현대과학>, <과학과 발명> 등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그는 한국 과학대중화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처럼 사회를 바꾸는 일과 괴리된 과학대중화 집단과는 다른 현장에서 성장해 사회 혁신을 꿈꾼 과학기술자였다. 그는 <현대과학>의 창간 축사에 이런 말을 남겼다.

“과학기술의 기초가 없는 경제는 외국에 빌붙어 사리만 챙기는 매판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할 것이며, 이는 실질상 식민지의 범주내에서 신음함을 의미한다.”

북으로 간 과학자 여경구도, 남에 머물렀던 과학자 안동혁도, 과학기술을 사회적 관점에서 사고하고 그런 과학기술을 위해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일본의 무역제재로 시끄러운 지금, 한국사회의 과학기술인과 구성원 모두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하는 문장이다. 우리는 어떻게 한국의 과학을 새롭게 혁신시킬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사회를 움직이는 이념, 그리고 그 이념을 마주할 때 더욱 진보적으로 변화하는 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주)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다음 논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김동광. (2006). 해방 공간과 과학자 사회의 이념적 모색. 과학기술학연구, 6(1), 8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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