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다녀왔다.

심리치료를 전공한 딸은 그동안 꾸준히 제 전문 분야의 책을 써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색다른 책을 출간했다.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기록한 것이다. 이 삼복더위에 내가 광화문까지 행차한 것도 딸의 책이 서점에서 제대로 홍보되고 있는지 상황을 살피러 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딱 한 권만 에세이 부스에 꽂혀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적들 사이에 단 한 권이라니.

요즘 사람들은 예전처럼 책을 사서 읽지 않는다. 출판업계는 어려워도 책 출간은 쉬워져서 하루에도 수십 또는 수백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다. 이 판국에 나까지 글 씁네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글공부 모임에 나가고 있다. 혹시라도 출판사에서 전화가 올 거라 기대하는 건 절대 아니다. 양심이 있지, 어찌 저 많은 책더미 위에 내 것을 하나 더 얹으랴.

물론 왕년에는 나도 글 좀 쓰는 줄 알았다. 남편이 연애편지 잘 쓴다고 부추긴 때문이지 딱히 근거는 없다. 나이 칠십에 문예지 등단이라는 것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허우대만 멀쩡할 뿐 알고 보면 말짱 장사꾼 속셈이다. 생돈 들여 문예지 사준 뒤로는 누가 내 글 보고 좋다고 하면 괜한 의심부터 든다.

2017년 봄에 난데없이 신문사로부터 글 청탁이 들어왔다. 5월 한 달간 4편의 글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화가의 아내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던가 보다. 화가가 좀 별난 구석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불 털 때 날리는 먼지처럼 사방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것은 다 고만고만한 시기를 살아왔기 때문인 터. 그래도 좋은 신랑감 마다하고 왜 가난한 화가를 선택했는지, 살면서 후회한 적은 없는지, 그런 것이 궁금하다면 내가 또 할 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만천하에 대놓고 남편 흉을 볼 수 있으니 이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나는 전에 써 두었던 글을 지면에 맞게 줄여서 한꺼번에 4편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바로 담당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은 소재라서 지루하니 한 편 정도는 다른 것을 써달라고 했다.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졌다.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졌다. 신문사에서 정해준 분량도 갑갑한 옷처럼 부담스럽기만 했다.

외국 여행 중인 딸에게 원고를 보내 피드백을 부탁했다. 그쪽은 밤일 텐데 득달같이 답이 돌아왔다.

“아빠 명성 뒤에 숨어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고 아빠의 얘기를 쓰더라도 엄마의 생각과 시선이 강하게 드러나야 해요. 그러면 아빠 얘기라 할지라도 엄마 얘기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딸 얘기는 내가 남편 명성을 우려먹고 있다는 거네? 백번 곱씹어도 옳은 말이긴 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알량한 자존감마저 곤두박질쳤다.

스무 살에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들어서서 나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었다. 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을 때만 해도 혼인 후 당장 끼니를 걱정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미래의 장인 앞에서 남편은 절대 나를 고생 시키지 않고 다니던 학교도 계속 다니게 해줄 거라며 단단히 약속했었다. 하지만 부조금을 야금야금 다 쓰고 나니 앞날이 막막해졌다. 할 수 없이 나는 입덧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구실로 남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가난뱅이 화가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동안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의 길은 미궁에 빠졌다. 마음만 먹으면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쓸 재료도 모자라는 판국에 내 몫을 챙길 여유가 어디 있냐는 핑계로 평범한 삶에 몰두했다.

알량한 월급을 모아 내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 뒷바라지가 일상의 전부였다. 큰애를 대학에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잊고 지냈던 오랜 꿈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남편의 작업실 한 귀퉁이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20년의 공백을 하루아침에 메울 수는 없었다. 나는 기대에 못 미치는 내 그림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 탓이었을까, 작업실에만 가면 어김없이 위경련과 두통이 왔다. 딱히 누구라고 꼬집을 수 없게 두루 원망하는 마음이 앞섰다. 실력을 차근차근 다시 만회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나 자신이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쓸 수도 없어 여러 날을 낑낑대다 할 수 없이 나는 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 얘기 말고는 도무지 쓸 만한 게 없다고. 그랬더니 젊은 기자가 웃으면서 조언해주었다. 친구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떻겠냐고. 결국, 그것도 남편 친구의 얘기로 끝났다.

딸이 보낸 메일을 다시 읽어 보았다. 같은 얘기라도 엄마의 시선으로 본 것을 쓰라는 말. 당장 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것은 내게 너무 어려운 주문이다. 하지만 단념하기는 이르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내 안의 내가 계속 소리친다.

요즘은 딸의 등쌀에 못 이겨 일주일에 한 번씩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글쓰기를 제대로 해보려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매주 한 번씩 과제로 내주는 글도 쓰고, 만나서 밥도 먹고, 수다도 떤다. 단언하건대, 난 죽기 전에 신나게 글을 쓸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찾아 나갈 생각이다. 한 발 더 내디뎌 그림도 다시 그릴 것이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으면, 글과 그림을 모아 자그마한 화집이라도 꾸려 내고 말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나의 버킷리스트 1번이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