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협동 금융의 산실인 ‘밝음신협’ 본점 건물에는 무위당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방문객들은 무위당의 서화작품, 도서, 영상자료, 유품, 기념품 등을 볼 수 있다. 최근 원주에서는 그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전국 조직 ‘무위당사람들’이 ‘무위당 25주기 생명협동문화제’를 열었다. 무위당은 대체 누구일까?

무위당 장일순 생전 모습. /사진=무위당사람들

65만 명의 조합원이 활동 중인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연합회(한살림).’ 한살림의 전신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한 사람이 원주 출신 교육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그는 1960~1970년대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에서 협동운동을 주도했다.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이승현 사무국장은 “협동조합이 일제 강점기에 들어왔지만 탄압에 의해 사라졌는데, 1965년 이 두 분에 의해 다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교육자·예술가...아이들 가르치려 학업 중단

장일순은 1928년 10월 16일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뒤 서울로 가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 공과대학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미군대령의 총장 취임을 반대하다 제적당했고, 이듬해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이 터져 학업을 중단, 원주로 돌아왔다.

밝음신협 중앙본점 건물에 무위당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무위당의 서화작품, 도서, 기념품 등을 볼 수 있다.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원주 지역에서 장일순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사무국장은 “대학에 복학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학비로 더 많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54년 지역 인사들과 힘을 모아 학교법인 대성학원을 설립했는데, 당시 20대 막내였던 장일순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름을 ‘대성’이라 지은 이유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장일순은 예술가로도 조명 받는다. 무위당사람들의 박설희 사무국장은 “장일순 선생은 서예로 마음을 다잡는 일이 많았으며, 동료나 후배에게 꼭 어울리는 메시지를 담아 서화를 직접 제작해 선물로 줬다”고 설명했다. 무위당사람들은 이 서화들을 수집해 엮어 18개 지역에서 전시회를 연 바 있다. 만년에는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낸 ‘얼굴 난초’로도 유명했다.

장일순과 지학순의 만남...협동운동의 탄생

지학순 주교(왼쪽)와 무위당 장일순. /사진=무위당사람들

원주의 협동운동이 시작된 때는 1960년대 가톨릭 원주교구가 만들어지고, 지학순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지 주교는 부임하자마자 장일순과 함게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교육사업과 사회활동을 펼쳤다. 1966년에는 원동성당을 중심으로 원주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 사무국장은 “당시 은행 대출은 서민들에게 문턱이 너무 높아 고리사채가 성행했다”며 “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지 주교가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에서 신용협동조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협은 문막, 단구, 주문진, 삼척 등에도 만들어졌는데, 운영이 어려워져 닫는 곳이 많았다. 이 사무국장은 그 이유를 교육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지 주교와 장일순은 1968년 원주 가톨릭센터에 협동조합 수업을 열어 교육을 시작했고, 1969년 10월 13일 진광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열고 전국 최초로 교내 협동조합까지 만들었다.

무위당기념관에 있는 장일순의 서화. 지렁이가 흙 속을 기어 다니며 땅을 옥토로 만드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글씨를 삐뚤빼뚤하게 썼다.

1972년 남한강에 대홍수가 닥쳤는데, 이때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했다. 위원회가 한 일은 무상원조가 아니었다. 이 국장은 “무상원조 방식이 아니라, 지역개발사업을 만들어 주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사업안을 도출하고 운영하게 하는 등 복구에 함께 참여하도록 했다”고 설명햇다.

장일순은 1985년 도농직거래 조직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했다. 기금 조성을 위해 서화전과 전시회를 열었다. 이름을 ‘한살림’으로 바꾼 후 서화를 만들었는데, 글씨 모양이 지렁이 같았다. 무위당사람들의 박설희 사무국장은 “‘지렁이가 땅을 살리듯 한살림도 땅을 살리는 운동이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일순은 1994년 5월 22일 보산동 자택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호가 무위당인 이유? “무소유 강조”

무위당 장일순의 25주기를 추모하는 '생명협동문화제'가 5월 18~19일에 열렸다. /사진=무위당사람들

장일순은 사상가, 철학자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불교·유학·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는 생명사상을 주제로 한 강연을 다수 열었으며, “내 것을 만들려고 세게 당기면 내 것이 되지 않고 쏟아질 뿐”이라고 무소유를 강조했다. 그의 호가 ‘무위당’인 이유이기도 하다.

장일순을 기리기 위해 만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단법인이 ‘무위당사람들’이다. 박 사무국장은 “장일순 선생은 호에 걸맞게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겼기 때문에 사망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이 2010년부터 사단법인을 만들어 활동 중”이라고 설명했다. 무위당사람들은 추모사업과 장일순이 추구한 생명·평화·협동운동 문화교육사업, 관련 서적 출판 사업, 서화작품 수집 및 자료집 제작, 인문 시민강좌 ‘무위당학교’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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