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는 협동조합의 메카입니다.”

이화여대 사회적경제협동과정 학생들과 방문한 밝음신협에서 만난 이도식 이사장의 말이다. 원주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주축으로 1960년대부터 협동운동이 이뤄진 지역이다. 고리사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6년 원동성당을 중심으로 원주신용협동조합이 생겼고, 천주교가 인수한 진광중학교에는 학교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1972년 남한강 유역의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지 주교와 장 선생은 무상원조가 아닌 자조·자립의 방안을 고민했다. 지역사회 복원운동인 협동조합 방법을 채택한 이유다. 현재 65만 명의 조합원이 가입된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의 전신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은 장 선생이 만든 단체다.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구성 현황. 네트워크는 2003년 ‘대안사회를 위한 새로운 기획’을 주제로 원주지역 8개 협동조합 단체가 모여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를 결성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미지제공=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현재 원주에는 지역 36개 사회적경제 조직과 전문가로 구성된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가 중심이 돼 사회적경제 교육, 금융기반 마련, 협동조합 체험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2003년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로 시작해 2009년 지금 이름으로 바뀐 뒤 2013년 사회적협동조합으로 거듭났다. 협동조합의 협동조합인 셈이다. 네트워크 내에서도 협동조합 간 협력이 활발하다. 네트워크 이승현 사무국장은 “반찬 공장을 가동하는 ‘원주생명농업’이 ‘스토리한마당’에 인쇄물·소식지 등을 맡기고, ‘노나메기’가 공간이 필요했을 때 한살림이 저렴한 가격에 빌려주는 등 연대·신뢰를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의 자원을 활용한다”고 밝혔다. 

원주 협동운동을 위한 인내 자본 '밝음신협'

밝음신협 이도식 이사장. 

신용협동조합(신협)은 공통된 유대 관계를 맺은 개인이나 단체가 조직한 금융기구다. 조합원의 금융 편의와 공동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1960년 부산 최초 신협인 ‘성가신협’을 시작으로 2017년 기준 895개 조합이 활동 중이다.

원주 ‘밝음신협’은 신협 중에서도 지역공동체를 위한 성격이 돋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원주 협동조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의 도움으로 1971년 8월 31일 창립총회를 개최 후, 원주 협동조합 역사에서 중추 역할을 했다. 시작 당시 조합원은 33명, 출자금은 1만 원, 자산은 1만6000원이었다.

원주시 중앙로에 자리잡은 밝음신협. 본점 건물에는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 무위당기념관 등이 입주해있다.

장동영 밝음신협 상임이사는 “조합원의 복리후생만을 지향하는 협동조합과들는 달리 밝음신협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에 자주 나섰다”고 말했다. 예로 1980년 말 응급환자를 위한 구급차를 원주소방서에 기증한 일이 있다. 이후 소방법 개정을 통해 119구급대가 공식 출범했는데, 밝음신협은 공로를 인정받아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원주의료복지사회협동조합(2002년), 원주협동조합협의회(2003년) 설립 지원은 물론, 매해 소외계층·취약계층 가정에 연탄 100만 장도 전달한다.

조합원의 신뢰로 똘똘 뭉친 신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외환위기 시절 3년간은 고용감축을 단행해 직원을 46명에서 23명으로 줄이고 장학사업 ‘밝음마당’ 운영도 중단할 정도로 재정 상황이 악화했다. 2005년 말까지는 배당도 중단했지만, 지역사회 복지활동으로 결속된 조합원들은 조직을 떠나지 않았다. 장 상임이사는 “일부 조합원은 오히려 증좌를 하는 등 어려운 시기에도 밝음신협을 밀어주는 사람이 많았다”며 “조합원 중심에서 더 나아간 시민참가형 복지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인식한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밝음신협의 현재 조합원은 18,678명이며, 임원과 직원은 36명이다. 중앙본점에 더해 3개의 지점을 운영 중이며, 895개 신협 중 자산규모 70위권에 있다. 본점 건물에는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입주해있다. 밝음신협은 최근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에 ‘협동기금’ 1100여만 원을 전달했고, 매년 당기순이익의 1%를 협동기금으로 출연하기로 결정하는 등 원주지역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주도하고 있다. 

지역 통합 돌봄 책임지는 '원주의료사협'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강원도 1호 사회적기업이다. 2002년 5월 원주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법인을 창립한 후, 2014년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20년 가까이 원주 시민, 그 중에서도 취약계층 시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의료사협은 의료, 건강,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주민과 보건의료전문가, 지역복지 전문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비영리법인이다. 일반 병원의 소유와 운영은 의료인이 전담하지만, 의료사협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대표기구를 통해 관리하기 때문에 영리추구보다 의료기관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다.

2018년에 진행된 건강반장 사례발표회. 올해 이 모델이 ‘강원형 사회적경제 통합 돌봄서비스 구축 시범사업’을 통해 확대되는 중이다.  /사진=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원주의료사협은 올해 ‘강원형 사회적경제 통합 돌봄서비스 구축 시범사업’ 수행 기관으로 원주, 영월, 횡성 등에서 활동 중이다. 이 사업의 핵심은 찾아가는 의료서비스다. 박준영 원주의료사협 이사장은 “이전에도 농촌 등 의료 사각지대 지원 활동을, 201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방문 진료 사업을 했다”며 “조합이 추구하는 가치와 현재 정부 정책 방향이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주 서곡지역의 경우 ‘서곡생태마을’이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며 돌봄, 건강관리 등이 필요한 대상자를 발굴한다. 서곡생태마을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지역에서 음악회나 공동육아 등을 진행해 자리 잡은 마을공동체다. 지역 내 노인 3명을 ‘건강반장’으로 뽑아 동네를 돌보는 ‘노-노케어’ 형태다. 의료사협에서는 의료진들이 주 1회 이상 해당 지역을 방문해 대상자를 찾아가서 진료한다. 박 이사장은 “농촌에 외부 자원이 직접 들어가서 지역민과 관계를 맺고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러한 모델을 통해 효과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으로 이어지는 '원주 교육공동체'

앞서 언급한 서곡생태마을은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에 있는 사단법인이다. 서곡생태마을은 ‘교육공동체’로 유명하다. 마을에 자리한 서곡초등학교는 2007년 89명에서 현재 200명 이상이 다니는 학교로 성장했다.

이화여대 사회적경제협동과정 학생들이 원주를 방문해 서곡생태마을 문병선 이사장(현 원주시 관광두레 PD)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화여대는 매년 국내 지역 한 곳을 방문해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탐방하고 있다.

학교 성장의 배경을 문병선 이사장은 “선한 이기심”이라고 설명한다. 2006년 6쌍의 부부가 육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서곡에 자리를 잡았다. 문 이사장도 그중 한 명이다. 이들은 서곡초를 중심으로 교육 협동조합을 구성했다. 그는 “구매력이 높지 않은 농촌지역에서 혁신적이고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사업할 수 있는 기업 형태가 사회적경제기업”이라고 말했다. 2011년 사단법인으로 출발한 서곡생태마을은 2013년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서곡초를 중심으로 7개 단체와 5개 협동조합이 함께한 서곡교육 네트워크가 창립했다. △영유아를 위한 ‘소꿉마당 어린이집, △초등학생을 위한 ‘자연누리숲학교’·‘참꽃방과후학교, △중고등학생을 위한 ‘청소년 pc방’·대안학교 ‘길배움터' △어른들을 위한 해금·독서·목공 동아리 등 생애주기별로 조직이 나눠졌다.

서곡마을 교육네트워크 지도. 서곡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돼있다. /자료=서곡생태마을

문 이사장은 “‘필요’에 의해 여러 교육시설들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되니 고용으로도 이어져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006년에 352명이었던 서곡4리의 주민 수가 2016년에는 508명으로 늘었다. 서곡초는 2012년 혁신학교로 지정돼 주변 협동조합들과 다양한 마을사업을 함께하며 원주 교육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역사 속에서 일군 ‘협동’ 키워드 지켜야

오랜 역사와 협동 경험으로 성장해온 협동조합의 도시 원주. 탄탄한 민간 네트워크가 형성돼있지만 고민도 있다. 이승현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원주에서 협동조합의 역사가 뿌리 깊고 정부에서도 수년째 지지하고 있지만, 지방자치단체나 의회 등에서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 국장은 “우리가 위탁 운영 중인 원주시협동조합지원센터 1년 위탁 비용이 올해 5000만원 수준”이라며 “원주가 협동조합의 고장이라 도시재생이나 사회적경제 관련 사업에 협력해달라는 요구도 많았는데 예산도 인력도 없으니 제약이 생긴다”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그는 “이번 정부 들어 민과 관의 사회적경제 활성화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는데, 오히려 협동운동의 중심지였던 원주가 상대적으로 뒤쳐질 수 있는 상황”라며 시민과 지자체가 더 관심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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