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한(忙中閑)이 아니고 한중망(閑中忙)이라고 해야 할까. 급할 일 없는 백수놀음 중에 며칠, 정신없이 바빴다. 사실, 바쁠 일들도 아닌데 미루고 미루다가 심장이 묵직할 만큼 부담을 갖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동안 무탈하게 해왔던 일들이 새삼 부담스러워질 리도 없고, 맞다. 이게 다 시끄러운 세상 탓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나라 걱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아침에 눈 뜨고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듣는 게 조국이고 보는 게 조국이다. 법무부장관 후보 한 사람의 친인척이 연루된 사모펀드, 딸이 제1저자로 등재된 논문과 무시험 명문대 입학, 낡고 낡은 위장전입 등으로 쏟아지는 공박의 물량이 가히 꿈 많은 소년, 소녀들의 BTS급. ‘이 사람, 평생 먹을 욕을 이번에 다 먹는구나.’하는 생각에 없던 측은지심이 무럭무럭 일어날 정도다.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정계의 족속들이야 그렇다 치고 언론, 학계의 인류들까지 오로지 물어뜯을 거라곤 이거 하나뿐이라는 듯 달려드는 모습은 세기말의 좀비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이다. 독 오른 발톱을 세운 대부분의 논리가 ‘불법은 아닐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라고?
이거, 선수들끼리 왜들 이러시나.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제도적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류들이 불평등수혜를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그런 일들이 어제, 오늘 만들어진 일이고 그게 조국 한 사람만의 문제인가?
물론, ‘폴리페서(정치참여 교수)’를 비난했던 과거가 현재를 찌르는 자해의 상황을 스스로 만든 사람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호러영화보다 더 끔찍한 이 좀비영화의 주제와 교훈이다(삼류 호러물에 그런 게 있을까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것은 고색창연한 법과 정의, 도덕, 양심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조국을 물어뜯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제외한)모든 기득권의 부류들이, 조국처럼 또는 그 이상으로 누려왔던 불평등한 편법의 제도들을 개선하겠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런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 그리하여 이 사회를 병들게 했던 제도를 바꾸는 것. 그것이, 처서(處暑)를 넘긴 계절이 무색하도록 기승을 부리는 이 좀비영화의 해피엔딩과 흥행을 그나마 보장하는 일이다.
홍익동 한국기원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2019 한국여자바둑리그 최종 라운드를 지켜보다가, 중국 산둥성 르자오시에서 중계되고 있는 세계 AI바둑의 향연을 지켜보다가, 그런 모습들이 오래 전 보았던 로봇 파이터와 인간의 휴머니즘(?)을 그린 영화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시집의 ‘해설이 들어와 편집을 끝내고 교정용 PDF파일을 보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메일을 열었다. 두 팔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오르도록 분에 넘치는 해설을 읽다가 문득, 시선에 걸려든 시 한 편을 음미한다. 이 시를 썼을 때 가졌던 생각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자기 본분만 지켜도 세상은 훨씬 평화로울 텐데, 그런 ‘반성’의 마음.
반성문 이로운 것들은 대체로 날붙이와 같아서 이로운 꼭 그만큼 위험하다는 걸 문득, 깨달았어요 이利는, 살리고 죽이는 칼이라는 걸 명심하겠습니다 |
국어사전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이로울 ‘리(利)’에 눈길이 멎었다. 거기에 날카롭다는 뜻도 함께 담겨있음을 알았다.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었으나 이로움과 날카로움이 한몸이라는 것을 처음 자각했으니 비로소 제대로 안 것이다. 사는 일 또한 모두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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