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 사망, 성수대교 붕괴, 사상 최고 더위. 1994년은 그 어느 때보다 굵직한 뉴스들이 많이 쏟아진 다사다난했던 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고도 성장과 민주화 정착에 몰두해온 한국은 정치?경제?사회 등과 같은 ‘거대 담론’에 주로 집중해왔다. 1994년 격동기를 배경으로, 여태껏 아무도 조명하지 않은 중2 소녀의 일상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나왔다.
‘벌새’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를 통해 삶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신인감독 김보라가 2011년 단편 ‘리코더 시험’에 이어 7년 만에 내놓은 첫 장편으로, 자기 자신의 유년시절 일부분을 각본 안에 녹여냈다. 소녀의 섬세한 내면을 감독 특유의 솔직하고 날카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는데, 마치 여성 작가가 써낸 장편소설 한 권을 읽은 듯 하다.
작품이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정식 개봉 전에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무려 25관왕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이후,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이스탄불국제영화제’ ‘말레이시아국제영화제’ 등 세계 곳곳의 15개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휩쓸었다. 영화계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에 비견될 만큼, 신인감독의 독립영화가 이뤄낸 성취는 대단하다”고 평했다.
러닝타임 138분. 2시간이 훌쩍 넘지만 ‘벌새’는 지루할 틈 없이 진행된다. 3남매 중 막내딸인 은희는 강남지역 아파트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 반 아이들에게 “저런 애가 나중에 우리 집 식모 된다”는 핀잔을 듣고도 그저 무덤덤하다. 학교보다는 남자친구 ‘지완’과의 데이트를 하거나, 절친 ‘지숙’과 클럽에서 춤추는 걸 더 좋아한다.
언뜻 ‘날라리(?)’처럼 보이는 은희는 사실 온갖 ‘가부장적 폭력’에 억압된 인물이다. 아버지는 대놓고 오빠만을 편애하고, 부모의 총애를 받는 오빠는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은희에게 주먹을 휘둘러 상처를 남긴다. 남성 담임 선생님 역시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에 가겠다”는 구호를 외치도록 시키며, 10대 아이들의 자유를 제멋대로 억누를 뿐이다.
이런 은희의 인생에 한문학원의 새 선생님 ‘영지’가 등장하면서 작은 숨구멍을 틔운다. 영지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진심을 다해 제자 은희의 마음에 귀 기울이며 이야기를 들어준다. 나랑 가장 가까운 줄 알았던 남자친구와 절친의 배신, 가족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예기치 않은 병으로 수술을 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까지. 10대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아직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
은희의 소박한 일상에 성수대교 붕괴라는 거대 사건이 얽히면서 ‘벌새’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연결해낸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라는 영지 선생님의 말처럼, 삶의 난해함과 복잡다단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여기에 김보라 감독은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하기에,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따뜻한 희망을 놓치 않는다.
관람 전후 궁금했던 제목 ‘벌새’는 조류 중 가장 작지만 1초에 90번이나 날갯짓을 하는 벌새에 은희를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은희의 모습이 세차게 날개를 퍼덕이는 벌새와 닮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특히 10대 사춘기 시절에는 저마다 성장하기 위해 날개를 바삐 움직였을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라는 포스터 문구처럼,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일으킬 만한 보편적으로 흥미로운 영화다. 이미 세계 영화제에서는 ‘벌새’의 날갯짓에 화답했다. 더욱이 여성감독, 독립영화의 설 자리가 넓지 않은 한국 영화계에서 이 작품이 어떤 성취를 보여줄 수 있을지도 기대를 모은다. 배우 박지후, 김새벽, 정인기, 이승연, 박수연 등 출연. 오는 29일 개봉.
사진제공. 콘텐츠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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