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300년 전에 쓰인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21세기의 눈으로 본다면 어떨까. 예비사회적기업 ‘문화공작소 상상마루(이하 상상마루)’가 그려낸 가족 창작 뮤지컬 로빈슨 크루소는 이렇다. 

가족 창작 뮤지컬 '로빈슨 크루소의 주요 배역들. (시계방향 환경공학박사 아빠 - 로빈슨 크루소 - 소라게 '구렙' - 손녀거북이 '프라이데이'/사진=상상마루)

환경공학박사인 아빠와 로빈슨 크루소가 어느 날 모험을 떠났다.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고 불시착한 곳은 거북섬. 그곳엔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코가 막혀 숨쉬기 힘든 할아버지 거북이와 온종일 쓰레기 치우기에 바쁜 손녀 거북이 ‘프라이데이’ 그리고 깡통이 제집인 줄 알고 지내는 거북섬 터줏대감 소라게 ‘구렙’이 살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불시착한 거북섬에서 거북이 ‘프라이데이’와 소라게 ‘구렙’과 함께 힘을 모아 거북섬에 쌓여 있는 쓰레기를 치워서 할아버지 거북이를 구해주고 난파된 배와 주변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활용해 배를 만들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플라스틱 쓰레기와 부서진 배의 조각들을 재활용해 만든 배. 환경을 지키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사진=상상마루

 

공연 기획 포인트는 ‘시대성’

 

상상마루가 그려낸 로빈슨 크루소에는 시대의 핫이슈인 젠더 문제와 환경문제가 녹아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남자 어린이가 아니라 그냥 호기심 많은 아이로만 그려진다. 배역에 성별을 지정하지 않는 젠더프리캐스팅(gender free casting)으로 남녀가 동시에 배역을 맡았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섬. 숨 못 쉬는 거북이는 얼마 전 코에 빨대가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바다거북이 동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한 어린이 뮤지컬 ‘로빈슨 크루소’. 남녀 배우가 번갈아 가며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를 연기한다./사진=상상마루

 

“ 로빈슨 크루소는 누구나 아는 명작입니다. 그런데 성인이 돼 다시 읽어보니 인종차별·식민사관·백인 우월주의 등의 시각이 눈에 보여요. 저희는 이 문제들과 대칭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문제와 상황을 모티브로 새로운 이야기를 기획했습니다. 공연을 기획할 때 중요 포인트는 시대성입니다. 미래의 모습을 어떻게 현재에 끌어다 놓을지 또는 과거의 일들을 현재에 어떻게 비출 것인지를 늘 고민합니다.”

-- 엄동열 문화공작소 상상마루 대표

 

공연이 끝은 아니다... 아트 콜라보로 부가가치 생산

 

많은 창작 공연들은 그냥 공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상상마루는 공연을 기반으로 다양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상상마루의 대표 콘텐트인 뮤지컬 ‘캣조르바’는 가죽 제조 전문업체인 사회적기업 서울가죽소년단과 만나 아트 콜라보 형태로 5가지 제품을 선보였다. 뮤지컬 스토리와 전통적인 제조업이 만나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상상마루는 사회적경제 영역 안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상상마루는 올해 창의혁신형 예비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 상상마루는 문화 예술과 제조업의 역량을 서로 결합하고 문화 아이템을 상호 공유해 새로운 상품을 개발, 유통할 수 있는 문화 공유 서비스로 공연의 부가가치를 높여갑니다. ”

캣조르바는 수학교육을 연계한 에듀테이먼트로도 평가받는다. 뮤지컬을 통해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하고 2차 콘텐츠로 수학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매스타임’과 함께 수학 놀이 완구를 만들었다. 또 지구온난화로 서식처를 잃어가고 있는 북극곰을 구해내는 캠페인을 벌이는 주얼리 제작사 보티카와 함께 아트 콜라보를 진행했다. 이 제품은 작년에 KOTRA에서 우수 아트콜라보로 선정된데 이어 올해 6월 방콕에서 열린 한류 콘텐츠 페스티벌에서 대표 아트콜라보로 선정됐다.


 
“공연은 꿈을 담아주는 그릇”

 

상상마루는 2013년 서울시 청년사업 1000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이곳에서 좋은 공연 기획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1년간 인큐베이팅 지원을 받으며 꿈을 키워갔다. 

2014년 창업 당시 달랑 책상 하나, 200만 원의 자본금이 전부였다. 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현재 정규직 인원 수는 4명으로 늘었고 프로젝트별로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80여 명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제작된 뮤지컬은 8편, 누적 관객 수는 15만 명에 이른다. 

엄동열 문화공작소 상상마루 대표

 

“ 상상마루는 상상으로 산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상상에서 출발해 작가·음악가·배우·무대디자인·조명감독 등 수많은 사람이 무대를 통해 자신의 꿈을 펼쳐갑니다. 공연이란 꿈을 향해 가는 길이지만 많은 사람의 꿈을 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전 프로듀서로서 제 꿈을 실현하는 것이고요. 전 작품 하나하나를 산으로 봅니다. 잘 가꾸면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가는 거죠.” 

남이 안 간 길을 가련다.

 

공연 관련 사회적기업의 패턴은 비슷하다. 장애인들이 공연예술단으로 들어오거나 꿈을 펼치기 어려운 청소년들을 교육해 무대에 서게 하고 혹은 지역 발전과 주민들을 위한 예술 활동을 펼친다. 

엄 대표는 “남들이 이미 가고 있는 길을 따라 걷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면서 “남이 가보지 않은 길에 도전하고 이를 개척하는 일이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상상마루는 스웨덴 아동 극단인 Zebra Dans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우수한 어린이 공연을 공동제작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Zebra Dans는 올해 스웨덴에서 최우수 아동청소년 공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유명 극단이다. 

“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해 만드는 작품입니다. 2020년 5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초연을 목표로 준비 중이며 그다음 한국공연을 거쳐 해외시장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제도 글로벌 이슈인 난민으로 정했습니다.” 

상상마루의 대표작 중 하나인 ‘로빈슨 크루소’는 해외에 공동제작 계약이 체결돼 중국 상해와 쑤저우에서 내년 7월 초연될 예정이다. 상상마루는 또 가족뮤지컬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 VR 기술을 입힌 새로운 콘텐트를 준비 중이다. 

VR기술로 새롭게 태어날 뮤지컬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은 공연을 보러 올 수 없는 아이들에게 공연의 맛을 선물할 전망이다.

 

“저희는 매년 소외계층의 어린이들을 공연에 초청합니다. 하지만 공연을 못 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안 오는게 아니라 올 수 없는 아이들이죠. 이들에게 공연을 가상으로라도 익히고 배우게 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가 VR 기술을 접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산업진흥원(SBA) 사업에 선정돼 올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 세상을 바꾼다”

기업의 기본 가치는 생존이다. 엄 대표는 “수익을 내고 그 잉여가치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사회적기업이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라고 말했다. 

캣조르바 공연 연습 현장. 엄 대표는 "한 해 대학에서 배출되는 전공자만 1,000명이 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입되는 배우들까지 합치면 연 4,000여명에 이른다"고 말했다./사진=상상마루

 

“한 해 1,000명~1,200명의 배우들이 배출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한정돼 있어요. 제작을 열심히 해 무대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창업 직전 우연한 기회에 공연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한 경험이 있다.  

“인생에서 바닥보다 더한 지하층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 경험이 있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요. 그 과정도 이겨냈는데 세상에 못 할게 뭐 있냐는 심정이 들죠.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 역시 뮤지컬이었다. 상상마루를 창업하고 첫 번째 내놓은 작품 ‘캣조르바’가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엄 대표는 제작하기까지 투자자로부터 20번이 넘는 거절을 당했다. 

“ 창작 뮤지컬은 투자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아무도 쉽게 투자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드는 사람의 피와 땀이 섞여야지만 나올 수 있어요. 그 리스크 역시 제가 다 지고 가야 하죠.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모든 걸 걸고 시작합니다. 매번... 매번...말이죠.” 

하지만 그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런 불확실성에서 나온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는 9월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2관에서 공연될 창작뮤지컬 원모어 포스터 앞에선 엄동열대표. 원모어(One More)는 하루에 갇힌 주인공이 하루의 소중함과 주변 사람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회적기업가들이 해야 할 중요한 부분은 바로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전이 항상 세상을 크게 바꿨습니다. ”

그는 “불확실성에 대해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면서 “공연 예술 분야는 결코 안정적인 곳이 아니며 꿈을 향해 그냥 가는 일이다”고 설명했다.

“전 나무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요즘 우리 사회는 한자리에서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살면서 소신 있게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그 일을 통해 좋은 가치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나름 만족스러운 인생이 아닐까요?”

사진. 이우기(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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