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쉽고 아름다운 문자, ‘한글’. 전 세계 2900여 종에 달하는 문자 가운데 창제 시기와 만든 사람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경우는 거의 없다. 광화문 광장을 거닐 때, 혹은 만원짜리 지폐를 쓸 때가 아니더라도 한국 국민들 대다수는 알고 있다. 한글이 조선 전기 세종대왕이 창제해 반포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학창 시절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연구해 1443년 한글을 창제한 뒤 1446년 반포했다고 배웠던 기존의 상식과 통념을 깨는 영화 한 편이 나왔다. ‘나랏말싸미’는 한글창제를 둘러싼 여러 가지 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임금 ‘세종’과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스님 ‘신미’가 한글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누구나 아는 세종과 달리 ‘신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는 영화에서 창조된 인물이 아닌 실존했던 사람이다. 세종이 죽기 전 유언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으며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이라는 뜻을 지녔다. 조철현 감독은 신미 스님에게서 영화적 실마리를 얻어 한글 창제의 새로운 시각을 담은 ‘나랏말싸미’ 각본을 완성한다.
작품은 불교 국가인 고려를 뒤집고 유교를 국시로 건국된 새 왕조 조선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고려의 문벌귀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억불(抑佛)’ 즉, 불교 탄압 정책이 추진된다. 승려에게 주어진 혜택이 철폐됐으며 사찰은 깊은 산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스님과 손을 잡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극적 상황’이 된다.
세종이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감수하면서 스님과 함께 새 문자를 만든 이유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의사소통은 우리말로 하지만, 문자는 한자를 사용했던 고려와 조선에서는 기득권층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문자와 지식을 독점했다.
극 중 세종은 왜 굳이 새 문자를 만들려고 하느냐는 신하의 물음에 “고려는 기득권층이 독점해 결국 나라가 망했지만, 조선의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며 성현의 가르침을 실현한다면 중국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백성이 깨우치기 어려운 한자 대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새 문자를 만드는 ‘미션’은 그렇게 시작된다. 중국의 각종 언어학 서적을 섭렵한 세종은 갈피를 못 찾고 괴로워하는데, 단서는 예상을 깨고 불교 유산 ‘팔만대장경’에서 찾게 된다. 대장경은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로 복잡한 불경을 기록했는데, 신미와 그의 제자들이 바로 산스크리트어의 능통자였다.
뜻글자인 한자 대신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세종은 “먹고 살기도 벅찬 백성이 배워 쓸 수 있으려면 무조건 쉽고 간단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새 문자를 구상한다.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소리를 보고 들으며 글자를 찾다가 어금닛소리(ㄱ), 혓소리(ㄴ), 입술소리(ㅁ), 잇소리(ㅅ), 목소리(ㅇ)라는 기본자를 만들고, 가야금 소리를 듣다가 또 한옥의 대들보를 보다가 자음 17자, 모음 11자 총 28자를 완성한다.
영화의 전반부가 한글 창제의 여정이라면, 후반부는 배포의 과정을 담는다. 신미와 그의 제자들, 세종과 그의 아들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백성을 위한 문자’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마음을 모은다. 그러나 힘들게 탄생한 한글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세종과 신미 역시 반포 과정에서 서로 뜻을 달리하며 충돌한다.
이때 나선 인물이 중전 ‘소헌왕후’인데, 남편 세종을 돕는 조력자이자 궁녀들에게 한글을 알리는 선구자의 역할을 한다. 조 감독이 극의 기본 얼개를 세울 때 “두 명의 졸장부와 한 명의 대장부”로 정했는데, 대장부가 바로 소헌왕후인 셈이다. 세종 역의 송강호, 신미 역의 박해일 사이에서 소헌왕후를 연기한 전미선은 자신만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랏말싸미’가 그의 유작이 됐다는 사실은 관객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실제 한글이 창제된 과정의 진실이 무엇이었든, ‘나랏말싸미’는 역사적 사건과 드라마적 상상력이 잘 버무려진 흥미로운 작품임에 분명하다. 백성을 위해 새 문자를 만드는 세종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리더의 모습, 제 밥그릇만 챙기려고 서로 삿대질하며 백성들의 안위는 외면하는 신하들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글처럼 온 백성이 아끼고 사랑할 만한 영화로 거듭날 수 있을지, 기대를 걸어보게 된다. 오는 24일 개봉.
사진제공. 영화사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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