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사회적경제 2.0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던져야 하는 화두다. 본지에서는 창사 11주년을 맞아 근대 협동조합의 발생지인 영국의 사회혁신 현장들을 방문해 오랜 기간 변화를 만들어가는 그들의 동력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살펴봤다. 브렉시트로 혼란기를 겪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사회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들의 앞선 경험과 고민 속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고민해본다.  

 

영국의 공업도시인 맨체스터주 북부 로치데일 지역 주민인 키스 트리나맨(Keith Trinnaman) 씨는 매주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한다. 그가 하는 봉사는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지역의 독거노인 또는 장애인들의 이동을 돕는 일이다. 주로 이들이 가는 곳은 시장이나 병원이다. 보통 병원까지 이동을 도울 때는 병원 입구에 내려주고 가는 게 아니라 진료실까지 이동을 돕고, 진료가 끝나면 다시 집으로 데려다주어 불편을 최소화한다. 이동 과정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는 건 당연지사. 이동 시에는 모두 자기 차량을 이용하지만 주유비만을 지원 받는다. 처음에는 1주일에 하루였지만 참여하며 보람을 느껴 최근에는 주 3일로 봉사활동을 늘렸다. 지인의 소개로 운전자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된 키스 씨는 “이들의 여정에 함께하며 도움을 주는 일이 정말 행복하다고 느낀다”며 “여가 시간이 남는 다른 사람들도 꼭 이 봉사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자차를 이용해 이동이 불편한 지역민들을 돕는 '자원봉사자 운전서비스'. 

키스 씨가 참여하는 활동은 로치데일의 한 단체가 운영하는 ‘자원봉사자 운전서비스(이하 운전서비스)’다. 현재 자원봉사자들이 이 운전서비스에 참여해 회원들의 이동을 지원한 횟수는 지난해 2/4분기에만 4,150회에 이른다. 이 서비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힘든 노인, 장애인 등의 이동을 돕는 서비스다. 택시 이용료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어 많은 주민들이 이 서비스를 즐겨 이용한다. 무엇보다 몸이 아플 때는 매사가 스트레스다. 병원까지 이동에서부터 진료실까지 함께 동행해주는 일은 서비스를 넘어 친구 같은 느낌마저 줘 이용자들의 마음까지 치유해준다. 

# 병원 이동·장보기 등 노인들 일상생활 지원...사회관계 개선되니 건강도 좋아져

이 운전서비스는 ‘HMR 서클(Heywood, Middleton&Rochdale Circle, 이하 HMR)’이 회원들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지역서비스다. 독립적인 생활이 어려운 노인을 위한 커뮤니티케어를 지원하는 HMR은 고령화 문제의 대안으로 이웃 간 품앗이로 노인 돌봄 문제를 해결하가는 사회적기업이다. 지역에서 독립적인 생활이 어려운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위해 서클을 운영하고, 그들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도록 자원봉사자와 매칭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전통적 돌봄 서비스와는 달리 이웃끼리 사회적 관계를 맺도록 하고, 그렇게 맺은 촘촘한 관계망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도록 한다.

HMR 서클 회원들. 이들은 같이 식사하기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해간다.

현재 HMR에는 832명의 지역민들이 이곳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 유료회원으로 가입했다. 회원에는 서클 소셜 멤버와 서클 운전서비스 자원봉사자가 모두 포함된다. 50-100세까지 회원 연령층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70-80대 고령자가 전체 회원의 60%를 차지한다. 대다수가 혼자 생활하는 독거노인들이다. 20-35파운드의 연간회비를 내면 HMR 서클의 회원으로 등록된다.

회원으로 등록되면 식사, 가이드 산책 및 관광, 공예, 음악공연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지원한다. 매월 다양한 프로그램이 담긴 뉴스레터인 ‘소셜 캘린더’가 회원들에게 전달되면, 관심 있는 행사를 예약하고 참여할 수 있다. 처음 5개로 시작한 회원 이벤트는 최근 월 50개로 늘어나 상시 운영된다. ‘저녁 식사하기’와 같은 간단한 활동에서부터 열기구 타기, 스카이다이빙 하기 등 모험을 즐기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다. 매월 프로그램은 회원들의 의견을 받아 조정한다. 보험도 가입해 서비스 제공 중 발생하는 사고에 대비한다. 특히 소셜캘린더는 월 예약이 500-800건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소셜캘린더를 관리하는 리앤 촐튼(Leanne Chorlton) HMR 매니저는 “점심 같이 먹기, 나들이 가기 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상어와 수영하기 등 놀라운 아이디어들이 대부분 회원들에게서 나온다”며 “집 밖을 나오기 귀찮아하고 힘들어하던 분들이 이러한 활동을 통해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혼자 사는 회원들을 위해 약 챙기기, 잔디 깎기, 잠긴 방문 열어주기 등 소소한 생활 서비스도 제공한다. 

혼자 사는 회원들을 위해 약 챙기기, 잔디 깎기, 잠긴 방문 열어주기 등 소소하지만 유용한 생활 서비스도 제공한다. HMR 내에는 서비스 제공을 위해 서비스 인력지원팀을 운영하고 자원봉사자를 연계한다. HMR 서클의 회원인 배리(Barrie) 씨는 “써클에 참여하면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점은 전화로 각종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라며 “서클 구성원들로부터 여행을 계획하는 법, 새로운 이메일 계정을 만드는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회원 대상의 유료 서비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회원은 아니지만 지역의 어려운 독거노인 등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무료 서비스도 제공한다. 무료 서비스는 기존 회원과 새롭게 참여하고자 하는 노인을 1:1로 매칭해 친구가 되어 주는 방식이다. 

매월 다양한 프로그램이 담긴 뉴스레터인 ‘소셜 캘린더’를 소개하는 리앤 매니저./사진=라현윤 기자

이러한 서클 활동이 HMR 회원들과 지역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  

HMR이 대학연구소와 함께 지난해 200명의 회원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회원활동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히 높았다. 회원의 79.9%가 서클활동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사회적 활동이 늘었으며, 약 56.8%는 건강과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고 답했다. 친구에게 회원 가입을 추천하겠냐는 물음에는 전원(100%)이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마틴(Martyn) 서클 회원은 “HMR 써클이 인생에 가져온 변화는 믿기 힘들 정도다”며 “외로움을 많이 느꼈는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요즘은 늘 여유롭고 느긋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 주민 스스로 만들어가는 커뮤니티의 힘!...돌봄 순환 체계 구축   

HMR의 시작은 8년 전인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런던에서 한 사회혁신단체가 제안하는 시범사업으로 시작되었지만 7개 서클 중 유일하게 HMR이 그해 6월 사회적기업을 설립했다. 마크 윈(Mark Wynn) HMR 대표는 “시범사업을 하면서 의미 있는 사업이라 생각했고 확산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사회적기업을 고민했다”며 HMR 설립 이유를 밝혔다. 초기 지원은 영국 첫 주택협동조합인 로치데일 주택협동조합(RBH, Rochdale Boroughwide Hosing)으로부터 받았다. 

HMR은 영국 서클의 시작인 'Participle'의 영향을 받았다. Participle은 노인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정부가 제공하는 돌봄서비스와 노인 당사자들이 원하는 사회서비스의 간극을 보완하기 위해 영국에서 새로운 사회서비스 모델로 등장했다. 노인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기본적인 요인으로 △최소 6명으로 구성된 정기적인 사회적 관계 △전구교체 등과 같은 일상생활의 불편 없음으로 보고 2009년 250여명 의 회원으로 구성된 사우스워크 서클(Southwark Circle)을 설립했으나 2014년 말 재정난으로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현재 영국에서는 HMR서클만이 성공적인 서클 사례로 운영되고 있다. 

HMR이 자리한 로치데일은 전체 인구 수가 20여만 명인 작은 지역이다. 영국의 신흥 공업 도시에서 19세기 초 쇠퇴일로를 걸으면서 임대주택과 빈곤층은 물론 노인 인구가 많다. 저녁이면 혼자가 되어 외로움을 느끼거나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다수다. 그러나 빈곤층이 많아 비싼 돈을 내고 돌봄을 받을 수는 없는 실정이다.  

HMR 서클을 유지시키는 힘은 자원봉사자들로부터 나온다. 사진은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모습.

HMR은 돈이 없거나 저렴한 비용만으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순환 구조의 서비스를 설계했다. 설립 8년 만에 회원 수는 3배 가량 늘었다. 개설된 이벤트만 500여개가 넘는다. 하지만 규모에 비해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고작 4명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뭘까? 바로 자발성에 기인한 시민들의 힘이다. 

HMR에서는 운전서비스에서부터 운영의 많은 부분이 자원봉사자들의 의해 이루어진다. 사회활동 후 은퇴한 이들이 자원봉사자 그룹의 주축을 이룬다. 마크 윈 대표는 “우리를 돕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를 통해 외로움을 잊고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어간다"며 "쌍방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HMR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는 70여명이다. 

또한 HMR의 프로그램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데는 시민들 스스로가 운영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HMR의 구성원들은 ‘이용자들이 주인이 되어 선택하고 프로그램을 짜도록 한다’고 입을 모은다. 4명의 직원들은 ‘단지 우리는 회원들을 돕는 역할’이라는 원칙을 이벤트 기획부터 운영까지 전 과정에서 고수한다. 마크 윈 대표는 “회원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서클이라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하기에 의도적으로 우리는 최소한의 기획만 한다”며 “이런 과정을 통해 회원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얘기하고 그걸 프로그램으로 제안하는 과정에서 자신감도 생기고 연결성도 강화된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 모집 포스터. HMR에서는 회원들을 시혜 대상이 아니라 '즐거운 인생을 즐기는 주체'로 대하고 마케팅에서도 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래서 디자인물 제작 시에도 밝은 색상을 주로 사용해 희망적인 느낌을 주려 노력한다.   

또한 기존의 저소득층이나 고령자를 시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공공서비스의 관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도 HMR이 내세우는 차별성이다. HMR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견지하기 위해 세심하게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운영한다. 나이, 성별, 계층 등의 구분 없이 누구나 와서 이용하고 친구가 되는 것을 강조한다. 회원 가입 시 한 달 수입 같은 것을 물어보지 않는 것도 작은 배려다. 회원 모집을 위한 마케팅에서도 회원을 도와야 할 대상으로 지칭하기 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주체’로 대한다. 마크 윈 대표는 “우리는 회원 모집을 할 때 회원들의 개인 스토리를 많이 보여주려 노력한다”며 “어떻게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는지, 당신도 이 행복한 사진 속의 한 사람일 수 있다는 걸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 수익 다각화, 시민참여 지속성 높이기 위한 방안은 여전히 과제  

HMR은 사회적기업이기에 지속가능한 수익 구조를 마련하는 게 과제다. 현재는 연회비, 자원봉사자 운전자 서비스를 통한 수익, 지방정부 지원금, 연구자료 제공, 컨설팅, 기부금 등으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회임대주택 회원 1200명이 단체회원으로 들어와 숨통을 틔웠지만 여전히 자립적인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수익 구조의 다각화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HMR에 관심을 가지는 곳들이 생겨나면서 소셜프랜차이즈 모델로 컨설팅사업도 하고, 자원봉사 운전서비스의 장기계획으로 앱도 개발 중이다.  

HMR의 또 다른 과제는 이곳이 운영되는 가장 강력한 힘인 자원봉사자 조직을 어떻게 더 확대하고 참여시킬 것인지, 그리고 노인 회원들이 현재 가지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확산하느냐다. 마크 윈 대표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보상이 없다면 활동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있어 즉각적인 보상을 최근 고민하고 있다”며 “타임뱅크 모델(자원봉사자가 지역에서 향후 노인이 되었을 때 다시 돌봄서비스를 받는 기회 제공)을 시도했지만 별 실효성이 없다는 평가도 있어 회원카드를 만들어 포인트를 쌓아 지역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 다양하게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마크 윈 HMR 서클 대표 

현재 HMR의 서클 모델은 다른 몇 개 지역에서도 실험 중이다. 마크 윈 대표는 “지역민이 원하는 이슈가 지역마다 모두 다르다”며 “지역별, 지역민의 특성을 고려한 방안을 고민하되, 이용자들이 주체가 되어 판단하고 서클이 운영되도록 하는 것은 어떤 지역에서도 지켜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의 사회혁신연구소 김정원 스프레드아이 대표는 “지역의 사회적기업이 중심이 되어 자발성에 기인한 시민의 힘으로 노인 돌봄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한국도 커뮤니티케어가 다시 화두인데 주민이 원하는 서비스를 어떻게 주민의 힘으로 만들어 갈 것인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사진제공=HMR 서클

해외 탐방은 사단법인 씨즈가 주관하고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와 한화생명이 후원하는 '2019 SEEKER:S(씨커스) 청년, 세계에서 길을찾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