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는 도산과 그를 마중한 여운형(1935)
1920년경_안창호,유상규,전재순,김복형이함께찍은사진
안창호
안창호_독사진
안창호가 중국 국적으로 발행받은 여권(복제본)
차리석이 저술한 『도산선생약사』
안창호의 여권(1902)

 

어쩔 수 없이 역사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오해가 진실이나 정설이 돼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왜곡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은 오해와 왜곡이 겹쳐지며 심한 상처를 입어야 했다. 그 폐해는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역사와 사회를 혼란시켰다.

도산 안창호(1878∼1938)의 독립운동을 보더라도 그렇다. 도산은 독립운동가 이전에 교육자, 도덕가, 인격자, 기독교인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독립운동 또한 점진적 실력양성론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통설처럼 굳어진 이런 도산의 모습은 해방 후 이광수의《도산 안창호》(1949)와 주요한의 《안도산전서》(1955) 등에서 비롯된 바 크다. 해방 직후 쓰여 진 이들 전기는 도산 연구의 길잡이이자, 바이블이나 마찬가지였다. 필자도 이들 저술을 통해 도산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도산의 초상’이 역사의 실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들 책에는 안창호의 독립운동이 누락된 게 많았다. 왜곡된 사실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도산은 꿈에서도 독립, 밥을 먹을 때도 독립, 자나 깨나 독립만을 생각하던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평생 직업은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이들의 저술에서는 그런 모습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이광수의《도산 안창호》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획을 긋는 1926년 삼일당연설 같은 것들을 빼고, 흥사단운동을 도산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본류인 것처럼 장식했다. 도산이 흥사단운동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산의 말처럼 흥사단 자체는 독립운동단체가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먼저 참사람이 돼야 한다는 독특한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이 흥사단운동이었다. 이광수(1892∼1950)나 주요한(1900∼1979)이 도산의 주변에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도산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도산을 선생으로 모신다면서도, 이광수와 주요한은 일찍 독립운동계를 이탈하며 도산을 배신한 사림들이었다. 때문에 비밀리에 전개한 도산의 독립운동을 알 수 없었고 그 진실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이광수는 자신의 ‘민족개조론’이 마치 도산의 영향에 의한 것처럼 교묘히 퍼트렸다. 도산도 민족개조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는 본질이 전연 달랐다. 독립민족으로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잘못된 부분들을 고쳐가자는 것이 도산의 민족개조론이었다. 그러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일본을 우등 민족으로 인정하고, 열등한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처럼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열등감과 패배주의에 젖은 것이라면, 도산의 민족개조는 세계에서 일등 가는 민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산과 이광수, 두 사람의 행로는 그런 차이만큼이나 너무도 크게 엇갈렸다. 도산이 독립운동의 혁명영수로서 역사를 빛냈다면, 이광수는 변절자로 전락해 씻을 수 없는 굴욕의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안창호가 국내에서 서거하자, 해외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계는 세계 각처에서 일제히 추도식을 거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장사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중국 한구(漢口)에서 각기 ‘혁명 영수’에 대한 추도식을 엄숙히 거행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좌파계열의 젊은이들이 주도한 단체였다. 이들은 추도식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도산의 통일전선 노선이 한국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뤘다면서, 혁명영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앙해 마지않았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뿐 아니라 각처의 한인 교회마다 추도식을 거행하며 마치 국부(國父)를 잃은 듯 비통함에 빠졌다.

그 중에도 서재필(1864∼1951)의 추도사는 의미심장했다. 좀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안창호의 갑작스런 서거는 한국에 커다란 손실이다. … 나는 그가 그의 동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가 조직을 만드는 그 능력,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편에 서는 친구로 만드는 그의 인품을 존경한다. 나는 한국인들 가운데 그런 확신을 심어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미국의 애브라함 링컨은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 위대한 지도자가 됐다. 안창호가 링컨과 같은 기회를 가졌다면 세상에 더 알려졌을 것이다. … 그의 견해는 편협하거나 인색하지 않으며, 다른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관대함을 지녔다. 나는 그런 인내심을 갖고 의견을 나누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의 냉철한 제안은 확고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솔직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요구할 경우에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안창호와 서재필(1925)

서재필은 도산과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나이로 봐도 한 세대 어린 도산이었다. 그렇지만 도산에 대한 신뢰는 존경에 이를 정도였다. 앞서 서재필은 1925년 9월 어느 연설에서 도산과 이승만(1875∼1965)을 평가한 일이 있다. 서재필은 도산을 두고 미국의 남북통일을 이끌어낸 애브라함 링컨과 같은 사람이라 평했다. 그러면서 ‘학교는 못 다녔으나, 천연적 지혜와 능력이 있는 인도자’인 도산을 한인들이 힘을 모아 한국의 애브라함 링컨으로 만들자고 제의한 바 있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장점이 많은 사람으로 특히 교육에 재주가 있으니, 교육의 인도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도산은 교육자, 이승만은 정치가가 더 어울릴 듯하지만, 서재필은 정치가로서 도산, 교육자로서 이승만이 맞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도 독특하다. 도산의 경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합의된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점을 높이 평가했고, 이승만의 경우 남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주장이 강해 정치에 부적합한 대신 뛰어난 두뇌로 박사학위를 받고 질서 정연한 논리를 지녀 남을 교육시키는데 더 어울린다고 봤던 것이다. 서재필의 지적은 음미할수록 의미가 더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산은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고, 독립운동의 고비마다 활로를 개척한 지도자였다. 미주 한인사회를 결집해 독립운동의 강력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대한제국이 망국으로 치달을 때 단신으로 귀국해 1907년 신민회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개척해 갔으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그 중심에서 임시정부를 경영했으며, 독립운동계가 사상과 이념의 분란을 거듭할 때 1923년 국민대표회의와 1926년 민족대당촉성운동을 주창하며 독립운동의 위기를 극복해 갔던 것 등은 도산이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크나큰 업적이었다.

1930년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할 때 사회 민주주의적 이론인 ‘균등’을 수용한 이도 도산이었다. 그렇다고 도산이 사상과 이념을 위한 ‘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독립 달성이라는 최고 목표를 위해, 사상과 이념은 방법이자 수단일 뿐이었다. 독립운동계에서 도산을 가리켜 ‘혁명 영수’라 일컬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도산의 독립운동은 본질적으로 독립전쟁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독립전쟁에 의한 독립 달성을 신념으로 삼았다. 나아가 그의 독립전쟁론은 민족의 자유 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한 차원에서 강구되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와 맞서 싸우는 한국 독립운동이 궁극적으로 반인류적 제국주의를 퇴치하는 운동이라 여긴 때문이었다. 도산의 독립운동은 혁명의 역정 그 자체였다. 그것은 마치 신앙과도 같았다. 독립을 위한 길이면 그 어떤 사상과 이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세계 곳곳까지 누비는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 종횡무진 활약한 도산은 정녕 독립운동계를 경영한 ‘혁명 영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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