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만 60세 정년을 맞는 인구가 처음으로 80만 명을 넘어서면서 ‘베이비붐 세대(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의 은퇴가 본격화했다. 평균 수명이 높아지고 출산율은 낮아지면서 전체 인구의 1/4, 생산가능인구의 1/3을 차지하는 5060세대의 경제활동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는 중이다. 이에 따라 은퇴 시니어들의 창업·재취업을 돕는 기관들의 역할이 강조된다. 사회적기업 '상상우리'도 매년 중장년 창업·재취업을 돕는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지난 한 해에만 중장년 800여 명이 참여해 제2의 인생을 준비했다. 상상우리를 통해 인생 2막을 연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이로운넷>이 전한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식물'을 주제로 한 '아트북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는 조희선 씨(위쪽)의 모습.

1988년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후 2015년 은퇴하기까지 무려 27년간 ‘아동복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살았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 남대문 시장까지 다양한 분야를 누비면서 활동했지만, 47세 나이에 의류 디자이너에서 은퇴했다.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의류업계에서 자기 브랜드를 내지 않는 디자이너가 40대 중후반까지 일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라고 했다.

퇴직 후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면 무엇을 했을까’를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꿈이었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2017년 문맹 할머니들에게 1년간 한글지도 봉사를 하면서 “나 자신이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이후 예비사회적기업 ‘히든북’을 만나 동화책 읽기, 아트북 만들기 등을 지도하는 프리랜서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조희선 씨(51)의 이야기다. 

아동복 디자이너로 27년, 은퇴 후 어린시절 꿈 ‘선생님’ 떠올려

조희선 씨는 "상상우리를 통해 '굿잡5060'에 참여하면서 그동안 디자이너로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나의 장단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양장점을 운영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의류디자인을 전공한 조 씨는 자연스럽게 패션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동복을 기획해 디자인하고 원단을 발주해 생산을 진행하는 등 업무를 하면서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지만,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특성과 내 성향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는 “보통 디자이너라고 하면 자기 고집도 있고 사업가로서 능력도 좋아야 하는데, 나는 고집보다는 생각이 유연한 편이고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바를 빨리 파악하는 쪽에 오히려 더 소질이 있었다”고 자기 자신을 돌아봤다.

디자이너를 그만두고 나서 조씨는 ‘내 성향과 맞는 일을 찾아보자’는 결심을 했다. 당시 은퇴한 시니어의 재취업을 돕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과 사회적기업 상상우리의 ‘굿잡 5060’ 프로젝트를 우연히 발견해 지원했고, 1기로 선발돼 교육을 받았다. 그는 “나의 장단점과 성향, 과거 일을 하면서 느꼈던 점을 분석하면서 나 스스로를 새롭게 알아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히든북’ 만나 다양한 책 수업 진행하는 강사로 새 출발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진첩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는 조희선 씨(오른쪽). 그는 "박혜원 히든북 대표가 젊은 청년이지만 신념이 분명하고 중장년인 내가 배울 만한 점이 많아 존경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굿잡 5060’을 통해 사회적경제 분야에 대해 처음 알게 됐고, 상상우리를 통해 ‘히든북’이라는 기업을 추천받았다. 히든북은 시민들이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소셜벤처로, 그때 ‘동화구연’을 할 수 있는 시니어 인재를 찾고 있었다. 조씨는 동화구연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여러 기업 리스트 중 유일하게 마음이 간 터라 문을 두드렸다.

2018년 9월 히든북에 입사해 6개월간 일을 하게 된 조씨는 서울혁신파크 안에 조성된 히든북의 작은 도서관을 활성화하는 업무를 맡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동화책을 읽어주고 함께 그림도 그렸으며, 파크 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책갈피 만들기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입사 직후 박혜원 히든북 대표가 지원을 받아 일단 6개월을 함께 일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해줬다”면서 “6개월간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이 그 공간을 드나들게 하는 모든 작업들이 너무 즐거웠고, 내 업무가 끝난 이후에도 도서관이 활발히 운영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대표와 상주 직원 총 2명이 일하는 작은 기업 ‘히든북’에서 조씨를 정식 고용하기는 힘들었지만, 올해 2월 ‘프리랜서 강사’로 협업을 제안했다. 히든북이 운영하는 다양한 책 수업 중 일부를 그에게 맡기는 식이다. 한 달에 1~2회 ‘서울로 북클럽’에서 성인 대상 아트북 만들기 수업, 서울혁신파크에서 수학여행 온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진첩 제작 강의 등을 진행 중이다.

“제2의 인생 꿈꾸는 시니어, 보람 느끼는 직업 찾아야”

조 씨가 수업한 '아트북 만들기'의 결과물. 디자이너 경력을 살려 원단을 활용해 책을 만들게끔 지도했다. 그는 "앞으로 은퇴한 인력들이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더 많이 늘어나기를 기대한다"며 "시니어들은 불편하고 어렵다는 사회적 편견이 깨졌으면 한다"고 이야기했다.

조씨는 “내가 나중에 책 수업을 진행할 거라는 생각은 단 1%도 하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이나 한글지도 봉사활동 등이 모두 도움이 됐다”며 “여태껏 내 인생에서 쌓은 경험들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예상치 못한 길을 열어줘서 참 신기하고 행운처럼 느껴진다”며 웃었다. 그는 앞으로 그림책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면서 작은 도서관에서 일하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조씨는 새로운 도전을 앞둔 다른 5060세대에게 “그동안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면, 2번째 직업부터는 자신이 잘하고 또 보람을 느끼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며 “어차피 경제적인 면에서는 은퇴 전보다 많이 벌 수 없기 때문에 내 성향과 잘 맞는 일을 찾아야 다른 만족감을 얻으며 몰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어떤 분명한 결과만을 기대한다면, 도전조차 시도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아주 작은 관심이 있다거나 젊은 시절 막연하게 꿈꿨던 일이 있다면, 일단 기웃거려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생각하지도 않게 어떤 사람을 만나고 교육도 받으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게 되거든요. 만약 길이 찾아지지 않는다고 해도, 해본 다음에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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