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프로들의 휘호부채./사진제공=손종수 시인

프로바둑의 여름은 조금 특별하다. 왜냐? 에어컨의 냉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한 자연풍. 그 바람의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바람의 이름을 짓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일까? 기상과학자도 아니고 국어학자도 아닌 프로바둑의 어떤 사람들이 바람의 이름을 짓나? 그거야말로 금시초문인데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실직고하자면 하늬바람, 높새바람, 소슬바람, 영등바람… 뭐, 그런 바람이 아니다. 언제였던가, 오래 전 한여름 대청마루 바둑판 앞에 앉은 할아버지가 살랑살랑 부치던 그 부채바람이다. 

사실, 요즘처럼 부채의 자리가 위태로운 시기도 없다. 실내에서는 에어컨, 선풍기에 밀려난 지 오래고 그나마 버티던 실외, 야외에서도 몇 해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몰이로 여름 나들이객들의 필수품이 돼버린 휴대용 미니선풍기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부채 이야기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부채는 특별한 애용품이다. 물론, 에어컨 쌩쌩 돌아가는 실내에서 바둑판 앞에 앉은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부채라면 그냥 부채일 리가 없다. 

바둑애호가들의 부채는 하나같이 독특한 붓글씨를 품은, 휘호(揮毫)라고도 하는 고유의 이름을 가진 부채인데, 맞다. 평범한 부채에 고유한 이름을 담아 특별한 부채를 만드는 사람들은 바둑의 한 시대를 풍미한 일대종사 또는 당대의 정상급 프로들이며 그들이 바로 ‘바람의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다. 

바둑 프로들의 휘호부채./사진제공=손종수 시인

홍익동 한국기원 1층 바둑용품 판매장에 가면 유명 프로기사들의 휘호부채를 볼 수 있는데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바람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바둑의 휘호부채는 일본이 원조다. 기모노를 닮은, 타이트하고 매끈한 맵시를 자랑하는 일본의 쥘부채는 일본항공의 탑승객들이 좋아하는 기념품으로도 유명한데 바둑계 유명 프로들의 휘호부채 역시 바둑애호가들이 꼽는 최고의 여름선물이다.

‘바둑의 성자(聖者)’로 추앙된 우칭위안(吳淸源) 선생의 ‘闇然而日章’은 중용(中庸)의 한 구절로 군자의 도를 담은 바람이며 일본 최고(最古) 타이틀 본인방 9연패를 기록한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9단의 ‘流水不爭先’은 불가(佛家)의 선승으로부터 받은 삶의 이치를 새긴 바람이다. 1980~90년대 일본 프로바둑을 제패해 재일한국인의 자긍심을 드높인 조치훈 9단은 ‘孤雲’, ‘風颯颯’, ‘柳絮隨風’ 같은 외로운 바람, 바람의 바람을 즐겨 불러냈는데 귀가 순해진다는 나이를 넘어선 이후로는 부쩍 ‘慈風’을 많이 쓴다.

한국바둑은 기모노에 비해 넉넉하고 풍성한 멋을 가진 한복 치마를 연상시키는 합죽선을 애용해왔는데 최근, 휴대의 간편함과 애완(愛玩)의 맛(?) 때문에 일본식 쥘부채로 바뀌고 있어 아쉽다(실용성이 개량된 합죽선이 나와, 다시 바둑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현대바둑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故) 조남철 선생의 ‘手談忘憂’는 바둑의 저변확대와 대중화에 평생을 바친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투영된 바람이며 ‘국수(國手)’라는 호칭에 가장 잘 어울리는 프로 김인 9단의 ‘鉤玄’은 바둑의 현묘한 깊이를 보여주는데, 고아한 글씨까지 일체를 이룬, 보기 드문 명품바람이다.

한국 프로바둑 타이틀을 석권하는 전관왕을 세 차례나 기록한 절대자 조훈현 9단의 ‘無心’은 모든 것을 이룬 뒤 다 비워낸 경지의 바람이고 한국바둑 최초의 아이돌이며 스승 조훈현 9단의 뒤를 이어 세계바둑을 제패하고 한국바둑을 세계최강국으로 이끈 이창호 9단의 ‘誠意’는 서툰 글씨만큼이나 진솔한 성정을 고스란히 담은 바람. 언제 보아도 벙긋, 웃음이 열린다.

21세기 한국바둑을 이끌어가는 있는 청년들의 바람은 어떨까. 랭킹1위 박정환 9단의 ‘同心’은 평범한 것 같은데 되새길수록 의미가 환한 바람이고 한국여자바둑은 물론, 세계여자바둑의 1인자로 떠오른 최정 9단의 ‘平安’ 역시 간명하지만 마음 느긋해지는 흐뭇한 바람이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산골로 낙향한 벗을 찾아야겠다. 별일도 없이 어색하게 멀어진 친구와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수담(手談)을 나누기 전에 예고하지 않은 깜짝, 바람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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