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 광경/자료제공=독립기념관

3·1운동 100주년의 열기가 이어지면서 ‘제2의 3·1운동’인 '6·10만세운동'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융희황제)의 국장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거사 3일 전 사전 발각되면서, 당초 계획에 미치지 못한 채 서울지역에서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로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6·10만세운동이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특별했다. 6·10만세운동이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3대 민족운동으로 꼽히는 이유다.

먼저, 6·10만세운동에는 계획 과정에 참여한 세력들이 다양했다.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롯해 천도교와 학생층, 국외에서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병인의용대 등이 호응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독립운동 세력은 각기의 정치 이념을 초월해 깊은 연대를 이뤄 나갔다. 3·1운동 때 종교 이념을 초월해 만세운동을 벌였다면, 7년 뒤인 6·10만세운동에 와서는 정치 이념까지 뛰어넘어 만세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민족통합을 위해 정치 이념도 초월해 갔던 독립운동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이 국외로 번져나가 1920년대 후반 크게 일어난 민족대당촉성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제공했다.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중국 상해였다. 상해에서는 6·10만세운동 보고대회를 열고, 그 정신을 계승한 민족대당촉성운동이 주창되기에 이르렀다. 민족대당촉성운동이란 정치 이념을 초월한 통일된 조직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자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계에서 민족통합을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1926년의 민족대당촉성운동은 독립운동계의 지형을 재편하는 전환점이 됐다. 6·10만세운동은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외의 민족대당촉성운동은 중국 관내를 비롯해 만주지역으로 확산됐으며, 그 여파가 국내로 미쳐 신간회 성립으로 이어졌다. 

6?10만세운동의 최초 계획은 국내가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 의해 구상됐다. 이들은 원래 1926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해 국내에서 대대적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4월 25일 융희황제가 서거하면서, 일제가 모든 집회를 취소하고 경계를 강화하자 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강구된 것이 3?1운동과 같은 만세운동으로 방향을 수정한 6?10만세운동이었다. 즉 메이데이 기념시위의 계획이 융희황제의 서거 이후 만세운동으로 전환해 갔던 것이다. 

불행히도 만세운동의 계획은 사전 발각으로 6·10만세운동은 커다란 타격을 입어야 했다. 만세운동의 정보를 탐지한 일제의 경계와 탄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만세운동의 낌새를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 일제는 혈안이 됐다. 일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경찰력과 군대를 투입해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며, 사상단체나 종교단체, 학교 등에 대한 검속을 대대적으로 감행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역, 용산역, 청량리역과 여관 음식점 등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출입자에 대한 검문 검색을 실시했다. 총독 사이토는 6월 7일 정무총감을 대동하고 조선군사령관 사택을 직접 방문할 만큼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서울에 동원된 일본 군대만도 1만 명에 달했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는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각도에서 50명에서 200명까지 경찰을 집결시켜, 3500명의 경찰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헌병대사령부는 나남, 함흥, 평양 등지의 헌병을 차출해 경계 강화를 지원했다. 그리고 기마경찰, 헌병, 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켜 거리로 내몰아 서울 거리는 온통 일본군대와 경찰, 헌병으로 가득 찼다. 

사진은 6.10만세운동 연설회가 열린 중국 상하이 삼일당 터. 당시 연설회에는 상하이 거주 한국인 2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료제공=독립기념관 

일제는 군경을 앞세워 무력시위를 전개하는 한편 주요 인사는 물론 각 학교와 사상단체 및 대중단체 등을 샅샅이 수색하면서 조금이라도 기미만 보이면 압수하거나 구금하면서 한국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밀을 보전한 학생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격문을 인쇄하며 거사 준비를 진행해 갔다. 그리하여 인산 당일의 만세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일제였다. 3·1운동 후 민족분열 및  분할을 획책하며 민족사회를 파괴하고, 융희황제가 병상에 있을 때부터 혹시 3·1운동과 같은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일제였다. 그런데 일제의 상상을 뛰어넘어 정치 이념까지 초월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해서 일제가 내린 첫 조치가 6·10만세운동을 왜곡하고 축소하는 일이었다. 6·10만세운동의 실상을 그대로 알렸다가는 식민지배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는 6·10만세운동을 축소, 은폐하기 위해 다양한 성격의 주체들을 분리, 별개의 사건인양 처리했다. 그래서 만세운동을 국장 당일 만세시위에 참가한 소수 학생들에 의한 ‘단순사건’으로 꾸몄다. 조선총독부는 당초 만세참가자 500~600명을 모두 구속키로 했으나, 방침을 변경해 나머지 학생들은 석방하고 11명만 재판에 회부했다. 그리고 형량도 줄이는 편법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다음의 조치는 1927년 초 신간회의 성립을 허가한 것이다. 일제는 사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민족세력의 좌·우 연대가 그렇게까지 공고할지 전연 예상을 하지 못했다. 일제가 신간회를 허용한 것은 기실 신간회를 통해 좌·우 연대의 실체를 주시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허가해 보니 일제의 예상을 뛰어넘자, 신간회 창립 직후 집회금지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신간회의 성립은 6·10만세운동과 그렇게 직결돼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조선총독부의 실정을 질타하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일본의 식민정책학자 야나이(矢內原忠雄)는 "6?10만세운동이 ‘문화정치’의 모순에서 비롯됐다"면서 “3?1운동이 정치문제에 국한됐다면, 6?10만세운동은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운동”이라 규정하며, 식민지 통치방침과 체제 전환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처럼 일본에서도 통치 방침과 체제의 전환을 운위할 정도로 6·10만세운동의 충격은 강력했다.

그럼에도 6·10만세운동은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제의 왜곡 선전에 따라 6·10만세운동을 학생시위 정도로 치부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어났지만, 운동의 주체와 이념적 측면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냈다. 학생을 비롯한 청년층이 만세운동의 전면에 나섰고, 이념적으로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연대하는 민족통일전선을 이끌어 낸 것이었다. 그것은 분파 및 정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독립운동계의 숙원과제를 해결하는 의미를 지녔다. 6?10만세운동은 독립운동계의 통합이 요구되던 시기에 그것의 실천적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며, 민족통합을 크게 발전시킨 독립운동이었다. 민족 독립을 위해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했던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는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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