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독립운동의 역사에는 아직도 식민용어나 식민사관에 의한 서술들이 독버섯처럼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몸에 짙게 배어 떼어내기조차 어려운 것들이 부지기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광복된 지 70년도 넘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선 식민용어의 대물림이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강제 지배한 것을 ‘일한병합(日韓倂合)’이라 불렀다. 처음엔 ‘일한합방(日韓合邦)’이라 부르다가, 한국과 일본이 동격의 나라가 아니라며, 천황의 나라인 일본이 제왕의 나라인 한국을 복속했다고 해서 ‘병합’이라 고친 것이다. 합방과 병합에는 그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미도 모른 채 광복 후 ‘일한’을 ‘한일’로 바꿔 오랫동안 ‘한일합방’ 내지는 ‘한일병합’으로 써 왔다.

더 큰 문제는 합방이나 병합에는 ‘일본의 침략’ 내지 ‘한국의 망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은폐된 점이다. 마치 한국과 일본이 서로 합의해 한 나라가 된 것처럼 꾸민 말이 합방과 병합이다. 합방이나 병합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대한제국의 멸망’이나, 망국, 또는 국치(國恥) 등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을사보호조약, 무단통치, 문화정치, 만주사변, 상해사변, 일본군위안부 등 식민용어의 잔재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일한병합기념사진첩' 표지.

 

일한병합기념사진첩 속 대한제국 왕실 사진.

 

한반도(韓半島)란 용어도 그렇다. 한반도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1902년 일본인이 간행한 책 제목에서였다. 일본인 기자가 2주 동안 한국을 여행한 뒤 감상을 적은 책이었다. 그는 섬의 기준에서 일본을 전도(全島), 한국을 반쪽짜리 섬이라는 뜻에서 반도라 불렀다. 한반도란 명칭은 식민지시기에 조선반도로 고쳐졌다. 일본은 주권체인 한국이란 명칭을 극도로 꺼렸다. 그래서 ‘한국’이란 단어는 식민지시기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선반도가 한반도로 다시 바뀐 것은 광복 후다. 그때 ‘반도’를 떼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더 널리 사용됐고, 아예 통일 한국의 깃발로 자리를 잡았다. 어떤 이는 반도라는 뜻으로 페닌슐라(Peninsula)란 말도 있는데 너무 과민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지리적으로 이베리아반도, 이태리반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영토로서 지칭할 때 ‘반도’를 붙여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한반도를 되돌리기에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 속에 뼈아픈 역사가 담겨진 것쯤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일본 기자가 쓴 책 '한반도'의 겉표지.

 

'한반도' 속표지.

 

'한반도' 서문.

 

다음은 식민사관에 의한 독립운동사 왜곡이다. 대표적 것이 독립운동을 ‘힘의 논리’로 재단하는 것이다. ‘힘의 논리’는 제국주의가 약소민족을 침략하거나 지배할 때,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낸 구호였다. 힘이 센 자가 지배하고, 힘이 약한 자는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강도가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힘의 논리’는 명백히 반인류적이며 비인도적인 것이다.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과 서술에도 힘의 논리가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 중에도 ‘독립운동과 광복’의 인과 관계를 힘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독립운동의 힘으로 일본군을 물리쳤어야 진정한 광복인데, 그러지 못했으니 광복은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대가로 얻어졌다는 인식이다. 이런 사고는 독립운동과 광복의 역사를 단절시킨 채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됐다.

한국인 가운데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독립운동이 ‘외지종결’됐다는 말도 이에 근거한다. '외지종결’이란 독립운동이 광복으로 매듭을 짓지 못하고 외국에서 활동을 끝맺었다는 뜻이다. 과연 독립운동은 광복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인가. 힘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과 싸운 중국의 ‘승전’도, 나치에 저항한 프랑스의 ‘해방’도 미국이나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이나 프랑스인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거나 생각하는 이가 없다. 그들은 미국이나 연합국에 고마워하면서도, 일본 군국주의나 독일 나치와 열심히 싸워 승전과 해방을 쟁취한 것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한국 독립운동에는 5백만 명이 참가했다. 그 가운데 희생당한 이도 수십만 명에 달했다. 그렇게 한국인들은 어느 민족 못지않게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다. 한국 독립운동은 제국주의 퇴치를 위한 세계평화에도 당당히 기여한 민족운동이었다. 안중근과 윤봉길이 중국에서 일제를 격퇴한 것이나, 광복군이 미군 OSS와 합동작전을 벌인 것도 세계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차원에서 결행한 것이었다. 역사는 힘의 논리가 아닌 인도적 관점에서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양심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인도적 기준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바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3·1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는 설도 연원을 따져 보면 일제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뜻도  모른 채 경거망동해 일으켰다”며 3·1운동을 폄하하고 왜곡했다. 한국인들에게 그것을 수십 년 동안 세뇌시켰다. 그러는 사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는 착종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오랫동안 3·1운동의 역사적 뿌리를 망각하는 우를 범해야 했다.     

식민사관 관련 사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의 길잡이.'

광복 후 독립운동을 폄하하고 왜곡시킨 주범은 바로 친일세력들이었다. 식민사관을 맹종하던 그들은 기득권을 독차지한 채 세상을 혼란시켰다. 그 때문에 독립운동은 광복된 조국에서도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 했다. 1970년대 만 해도 독립운동의 경력을 감춰야만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 독립운동의 역사가 철저히 외면당하고, 오랫동안 양심과 정의를 세우는 데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민족독립과 항일을 외쳐댔지만, 친일에 몸담았던 많은 이들이 자신을 변명하고 옹호하기 위해 진실을 심하게 훼손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독립운동하다가 옥살이한 것을 두고 ‘전과자’라 불렀으며, 독립운동의 경력이 밝혀지면 마치 사회적 문제아 내지 불평분자로 낙인찍혀 취직조차 어려웠다. 한국 현대사의 서글프고 부끄러운 단면이 아닐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독립운동사가 학문 분야로 인정받는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전까지 선구적 연구자들에 의해 개척적인 연구가 이뤄졌으나 학계 전반으로 뻗어나가지는 못했다. 1980년대 초까지 대학에서〈독립운동사〉강좌가 개설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사에는 학문적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곳곳에 스며들어 역사상을 혼란시킨 것이 적지 않다. 풍설로 전해지던 독립운동의 이야기가 사실처럼 자리 잡아 독립운동의 실체를 밝히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의 논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독립운동의 역사를 천박하게 만든 책임도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고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저절로 지워지거나, 해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식민잔재의 폐해는 독립운동의 역사조차 얼룩지게 할 만큼 심각하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정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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