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랫동안 시를 써오면서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도대체 시인들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돈도 되지 않는 시를  쓰냐?’는 거였다. 

산을 타는 일 자체가 업인 등반가에게 ‘다시 내려올 거면서 뭘 그렇게 목숨까지 걸며 오르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무례를 넘어 무지한 질문인데 그런 비아냥거림이 상당 부분 물질만능시대의 현재진행형 사실이라는 심정의 시인(是認)에 닿을 때마다 피식, 웃고 만다.

여기서 문화예술의 몰이해를 조장하는, 심하게 일그러진 이 나라의 교육. 취업 준비학원이 돼버린 초, 중고등학교와 취업 전문학원이 돼버린 대학교의 제도와 정책을 성토하고 싶지는 않다. 

학교교육이 생계형 취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학교교육이라면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해야 할 일 중에서 잘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보호(?)돼야 하지 않나? 문화예술이 그런 토양에서 피어나는 꽃나무라는 걸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진다. 

해야 할 일 중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는커녕 졸업과 동시에 사회조직과 기업이 원하는, 또 다른 취업학원과 알바를 전전하면서 오로지 생계의 길로 내몰리는 아이들을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날 만큼 갈 길이 아득하다.

2. 합정역 지하철 자동계단 오르자마자 마주 보이는 패스트푸드점 열린 문으로 뛰쳐나온 각종 음식냄새가 후각을 냅다 찌르고 달아난다. 한순간 휘청, 흔들린 게 몸인지 지하상가인지 잠시 어지럽다. 요즘은 이렇게 날카로운 자극을 갖춰야만 제값의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점심 전인 데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와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었는데 갑자기 갈증과 허기가 몰려온다. 몸에서 보내온 알림이 아니므로 이건 정신의 신호, 마음에 고여 있던 갈증과 허기의 호소겠다. 

맞다. 그래서 쓴다. 글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영장류라는 별종으로 다른 동물들과 차별성을 갖게 되면서부터 사람은 몸이 원하는 먹을거리가 아닌 정신이 원하는 먹을거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모든 예술행위의 당위(當爲)가 되었다. 문학, 시(詩)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사회조직이나 기업이 원하는 일과 상당수의 예술행위가 매우 낯선(심지어는 적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해서 특정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술행위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술이 가진 삶의 위로, 치유, 구원 그리고 사회적 기여의 공능에 대해서 다양한 계층의 소통과 이해와 공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 낭독 모임 ‘[광개토] 개.판 치고 토끼.소’ 낭독&토크 이미지.

3.  시의 대중화, 저변확대를 위한 특정한 놀이형식의 시 낭독 모임 ‘[광개토] 개.판 치고 토끼.소’를 소개한다.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인이나 특정단체의 이익을 위한 ‘패거리’를 철저하게 지양하면서 시를 좋아하는 대중에게 직접 다가간다는 것이다. 

‘[광개토]개.판 치고 토끼.소’는 재능기부, 사회봉사 같은 약속의 시 낭독 행사를 위해 모였다가 행사를 마치면 미련 없이 흩어지는, 자유로운 개성을 가진 시인들의 모임이다. 베이비붐세대의 맏이면서 퇴역전선을 넘나드는 ‘청년노인’, 개띠(58년생) 시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토끼띠(63년생) 시인 둘이 참여했으며 소띠(61년생) 시인이 합류해 세 번의 시 낭독 행사를 가졌다. 

모임의 전원이 시 낭독에 참여한다는 원칙 때문에 행사의 시간제한 문제가 발생해 모임의 인원을 더 많이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아쉬움은 그때그때 행사의 성향이나 지역의 연고를 따져 적절한 시인을 초대, 함께 하는 것으로 보완한다.

예술, 문학, 시는 자기 위로, 치유, 구원으로부터 타인을 향한 위로, 치유, 구원으로 확장되는 소통과 공감의 문화행위다.

나는 오늘도 육체의 생존을 위한 몸이 원하는 먹을거리가 아닌,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영장류임을 증명하는 행위로써 견딜 수 없는 정신의 갈증과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시를 쓰고 읽으며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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